최선이 아닌 최적의 삶을 향하여
‘최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긍정과 부정 중 어느 쪽으로 다가오는가? 한국은 최선 예찬의 사회다. 해가 넘어간 늦은 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과 스터디 카페의 불빛, 아직 새벽닭이 울기 전 집 밖으로 나서는 사람들. 이 모습들 모두 열정과 최선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풍경으로 이 장면들을 보면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 안 개인의 얼굴을 보면 그들의 표정은 어떨까? 행복과 피로 중 어느 쪽에 절여져 있을까? 에세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위로와 힐링이지만 자기 계발서 분야의 베스트셀러는 미라클 모닝과 독하게 사는 법인 서점의 모습도 생각나게 한다. 위로받고 싶으면서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러니. 필자는 이 모두 능력주의의 환상이자 속도만 생각할 뿐 방향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게으른 변명으로 들린다.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는 가장 세련된 가스라이팅이 되었다.
인간은 총량이 있다. 체력의 한계와 인지의 한계 모두 가지고 있는 유한한 동물이다. 그러나 사회가 그리는 이상적 인간상은 무한동력 기관에 가깝다. 개인의 의지라는 것은 점심 메뉴를 고르느라 쓴 에너지가 오후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한마디로 의지력의 총량이 있는 것인데 이를 정신력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과학적 무지에 가깝다. 더하여 매일 100%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은 바보 같다. 차를 운전해도 기름이 다 떨어지기까지 운전해서는 안되며 기계도 100%로 계속 돌리면 부하가 걸려 고장이 난다. 매일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지속 불가능을 전제로 한 자살골이다. 잘못된 지도를 들고 최선을 다해 뛰는 사람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다. ‘열심’이라는 것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외부에서 개인을 감시했지만, 이제는 각각의 사람이 타인의 채찍보다 무서운 내면의 감시탑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과거 규율 사회는 “해선 안 된다”라고 금지했지만, 현대 성과 사회는 “할 수 있다”라고 부추기고 개인은 이 긍정성에 취해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들이 다 뛸 때 나만 서 있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소진하게 만드는데, 가해자도 나고 피해자도 나다. 내가 나를 착취하는 구조가 더 무서운 것은 거부와 저항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나의 부족이라는 자책이기에 번아웃이라는 결과는 열심히 산 자의 훈장이라기보다 자기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신호다. 구조적 문제를 먼저 보지 않고 개인의 노력을 탓하는 것은 숲의 일부인 나무 하나에게 숲의 문제를 전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스템의 결함을 사람의 몸으로 때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최선보다 최적의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 더 쉽게 말해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노력의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비겁한 행동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야구에서 타자가 투수의 모든 공을 홈런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타석에 임한다면 그 선수는 홈런 타자가 아니라 삼진 아웃의 대가가 될 것이다. 기본값을 조정해야 한다. 평범한 노력으로도 굴러가는 환경과 루틴을 세팅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삶을 설계하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유지되는 것이 삶이라면 세팅 값이 잘못되었다.
이솝 우화로 개미 사회가 성실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사실 개미 나라는 항상 유휴 에너지와 인력이 있다고 한다. 모든 개미가 항상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비율로 소위 놀고 쉬는 개미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개미들이 있어야 유사시, 정말 최선과 전력을 다해야 할 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을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김영하 작가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또한 사람이 누리는 가치라는 것은 생산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 성격의 것이다. 오늘 아쉬움이 남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다행이고 또 잘했다. 내일을 살아갈 지혜는 쉬는 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