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파는 효율적 결혼

결정사와 인간 소외에 대하여

by 안진

‘자만추’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줄인 것이다. 말 그대로 소개 따위의 방법이 아닌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연인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과는 반대로 보다 적극적인 의지와 개입을 통해 만남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정보회사다. 결혼에서도 효율을 추구하며 시간 낭비,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여 결혼이라는 목적에 골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것인지 결혼정보회사는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왜 청년들은 연애 세포가 말라간다고 하면서도 결혼 시장에 나서는 것일까? 이 자체를 문제라 치부하기는 어려우나 결혼정보회사의 호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불안을 담보로 인간을 규격화된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사랑법이자 우리 사회가 도달한 물신주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외모, 재산, 학력, 가족 사항 등 그 사람의 전반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분류표에 따라 분류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것이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 일관된 분류로 줄을 서 왔기에 색다른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옳은 것도 아니다. 결혼정보회사들의 입장은 대부분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아니고 서로 원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분류하여 그룹화하는 작업으로 매칭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 설명이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나 어쨌든 사람을 납작하게 본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 사람의 서사, 취향, 가치관은 사라지고 숫자와 기호로 표현되는 현실은 뭔가 씁쓸하다. ‘안정적’, ‘매력도’ 등의 단어로 치환되지만 실상 투자 가치로 표현하는 주식 시장의 논리와 무엇이 구조적으로 다른지 모르겠다.

하여 육각형 인간이라는 말이 나온다. 육각형이라는 것이 결혼 시장에서만 쓰이는 용어는 아니나 어디 하나 빠짐없이 조건이 좋다는 뜻이다. 과거 외모 지상주의의 발전된 유형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의 결과물이자 전시할 수 있는 트로피쯤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필자가 사랑을 너무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조건의 상호교환 속에 상대를 목적적 의미의 사랑보다 수단적 의미의 액세서리로 취급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싶다. 나의 배우자를 선택함으로 사회적 지위의 안정이나 완성을 꾀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근본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 또는 결함이 최소화된 사람을 찾는 것은 명백한 시장 논리로 사랑의 본질적 기능을 거세하는 행위다.

위에 기술한 지적들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점을 사람들이 짐작할 텐데도 결혼정보회사가 호황을 맞는다는 것은 먼저 시뮬레이션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는 미래를 계산하는 행위가 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효율을 생각하며 여러 시나리오를 구상해 보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결혼에서도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한 번에 실패 없는 만남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경향성은 사회적 안전망과도 닿아있다. 사회적 인식과 사실이 실패해도 기회가 주어지는 문화가 아니라 낙인찍어버리는 것에 가깝기에 실패하지 않는 결혼의 환상이 존재한다. 결국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시스템은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계급 매칭, 계급 추락 방지 보험의 성격이 짙다. 이는 계급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으로 계층 이동을 막고 기득권층의 성벽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랑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을 계급 구조 공고화에 복무하게 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삶과 사랑은 불확실성을 껴안고 견디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래 무의미하고 일면 비효율적인 것이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효율과 조건을 따지는 결혼은 결국 거래이자 계약일뿐이다. 거래가 끝난 뒤, 조건이 사라진 뒤에는 관계도 소멸함을 전제로 시작하는 것이다. 조건을 지운 자리에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앗아간 인간성을 회복하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성적도, 사랑도 당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묻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고유한 우주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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