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물성
2026년의 아침은 AI와 대화하고 공장에 기계가 들어가며 드론이 배송하는 시대다. 필자는 이런 시대에 평일 아침 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4시경이 되면 신문 배달부가 우편함에 그날 신문을 넣어놓고 간다. 툭하고 전해지는 조간신문의 둔탁한 소리는 0과 1,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날아든 종이라는 물성의 소리다. 2017년 홈스쿨링을 시작할 때부터 2026년 청년이 되기까지 약 9년간 신문을 읽었다. 하나의 신문사만 읽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 읽는 신문사에 정착한 지는 2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액정보다 종이의 질감을 선호했던 것 같다. 종이의 거친 질감, 인쇄된 냄새가 너무도 편안했다. 또래들이 숏폼의 도파민에 젖어들 때 잉크 냄새를 맡으며 활자의 바다를 부유했다.
AI와 알고리즘의 기술은 개인의 성향에 맞는 콘텐츠들을 골라 추천해 준다. 매우 유용한 기능이지만 이런 기술은 확증편향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하는 것처럼 뉴스도 편식하면 영혼을 살찌우는 대신 비대한 자아만 남는다. 그리고 특정 성향을 보인 사람끼리만 모이면 에코체임버 현상이 생기며 인식이 사실로 굳어진다. 균형이라는 것이 가운데에 서 있다고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고통과 반대의 독립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종이 신문을 펼치는 순간이면 보고 싶지 않은 것들도 보게 된다. 강제로 세상의 모습과 타자에 노출된다.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경험이라 생각하고 신문을 읽어왔다.
필자 자체가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이긴 하다. 신문만 읽는 것이 아니라 책도 좋아하기에 현재 소유한 책이 820권가량 된다. 장서가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권수지만 보통의 사람 중 이 정도 책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에게 시대와 인류의 지성은 전자기기 속이 아니라 누런 종이 위에 숨 쉬고 있다. 신문을 읽고 책을 꽂으며 배운 사실은, 정보는 클라우드에 있지만 지식은 물성에 깃든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지혜 또한 피어난다고 믿는다. 종이를 어루만지는 감각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사유의 생태계를 보전하고 존중하는 노력이다. 텍스트나 종이의 멸종이 아니라 깊은 읽기가 멸종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세상에 내가 느끼는 물성의 소중함을 경험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텍스트는 어렵다. 버겁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종이가 가장 좋은 것이라 말하지도 못하겠다. 활자를 읽는 것은 유희보다 일이나 노동에 가깝다. 인간의 진화에 그리 자연스러운 행위도 아니다. 그럼에도 활자의 난해함을 마주하는 것은 삶에서 한 번은 깨고 나와야 할 세계라 생각한다. 쉽게 읽히는 글은 나를 위로하고, 어렵게 읽히는 글은 나를 성장시킨다. 세상에는 여러 레이어가 있고 독립된 사실들이 거미줄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려움을 견디는 능력이야말로 복잡다단한 사회를 견딜 힘이 아닐까? 답을 내리기보다 옳게 질문하기 위해 활자를 접해야 한다.
접고, 펼치고, 쓰는 삶의 의식은 인생을 지탱한다. 2026년에 여전히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유효한가?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 사실이냐 묻는다면 ‘알 수 없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 세계에 있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생태계가 있다. 아마존에 살지는 않지만, 지구 생태계에 아마존이라는 숲이 꼭 필요하듯이 지성이 숨쉬기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생태계가 보전되어야 한다. 내일도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것이 시대를 사랑하고 또 저항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