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식민지

외모 절대주의 사회

by 안진

사람의 얼굴은 다 다르다. 개성과 다양성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 하나가 외모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정답화된 미를 강요한다. 외모는 취향의 영역에서 지상주의를 지나 절대주의까지 도달했다. 한국에서 외모는 가치와 존재를 증명하는 절대적 계급이다. 이 폭력적인 잣대가 드리우는 그늘은 청년을 넘어 청소년에게까지 도달했다. 미디어의 발전에 따른 숏폼의 인기는 10대들에게 외모를 등급화하고 기형적인 외모 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왜 한국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검열하고 학대하는가? 이는 개인의 판단과 사고가 미숙한 탓도 있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자본의 논리와 파편화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비극이기도 하다.

자기 관리라는 것의 목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에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목표의 방향이 외부 특정 기준에 맞추어져서는 안 되고 개인의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기 신체를 미디어에서 정한 모습에 따라 맞추려 드는 것은 더 이상 관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라는 허상을 위해 자신의 고유성을 내어주는 파우스트 적 거래의 성격을 띤다. 청년, 청소년들은 껍데기를 얻기 위해 내면의 깊이와 사유를 맞바꾸는 손해 보는 장사를 일삼는다.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며 규격화된 상품으로 치환한다. 자신에게 엄격한 외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타인을 볼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애할 때는 물론이고 친구를 사귈 때조차 외모를 따진다. 인간을 판단할 때는 입체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사람이란 다면적이기에 외모가 판단의 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처럼 외모만을 소비하며 맺는 관계는 한계가 명확하다.

자아와 타자를 외모로만 판단하는 추세를 등에 업고 발전하는 산업도 존재한다. 보디프로필과 룩맥싱 신드롬이 이를 대표하는데 이 흐름은 건강이라기보다 자본주의적 전시장에서 자신을 더 비싼 값에 매기기 위해 육체를 착취하는 행위에 가깝다. 뷰티, 다이어트 약품, 피트니스 및 성형 산업의 대부분은 불안을 상품화하여 이득을 취한다. 청소년, 청년에게 만연한 불안과 결핍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모습은 불편하다. 이렇게 외모가 상업화가 되면 외모를 가꾸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자본의 계급이 외모의 계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경제적 불평등이 학업의 불평등을 넘어 외모의 불평등으로 이전되었다.

한국의 청소년, 청년들이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통제 불능의 시대다. 학업, 고용, 주거 등 삶 전반의 것들은 구조적으로 제약당하고 평가받으며 불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자신의 몸이다. 실업과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실패가 주는 무력감을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 돌리며 이상한 욕망의 풍선효과가 일어난다. 이 시대의 청소년과 청년이 각자의 거울 앞에서 신체를 바라보는 시간이 증가할수록 세대가 함께 연대하여 사회의 모순에 맞서고 광장으로 나설 시간은 소멸한다.

그렇다고 외모가 필요 없다거나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필자 개인적으로 외모란 내적 가치의 외적 표현이다. 그렇기에 멋짐, 잘생김, 예쁨, 아름다운 것보다 단정함, 깔끔함, 예의 등의 단어를 떠올리며 나를 가꾼다. 청소년, 청년들은 외모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세간의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는 것이 거의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내 몸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껍데기에 부여된 왜곡된 인식을 내려놓고 기형적 사회 구조에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주체적 도구의 몸의 의미를 사용하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낭만의 함정과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