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무감각 사회

예정된 파국

by 안진

한국의 자살률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인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한국 청년 자살 또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최소 20년 이상 누적되고 악화해 온 오래된 구조적 타살임에도 충격적인 지표가 발표돼도 뉴스조차 되지 못한다. 국가는 합계출산율을 운운하고 사람들은 한국이 끝났다는 영상을 입에 올리지만 매일 스스로 우리 곁을 떠나는 생명에 대한 경악스러운 지표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각하다. 낳지 않는 것과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따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청년들이 가장 극단적이고도 합리적인 존재의 파업임을 알아야 한다.

경제 규모가 성장하고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나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2030의 자살률은 꺾이기는커녕 올라간다. 사망 원인 1위가 압도적으로 고의적 자해인 기형적 현실은 절망의 그래프다. 지난 수십 년간 자살 예방 문구를 다리에 넣고 24시간 운영하는 상담 서비스를 만들며 당신은 혼자 아니라고 캠페인 했지만 그 대책들 모두 피상적인 대책에 불과했다. 정책의 얄팍함에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 죽어갔다. 주거, 노동, 부채 등 물질적 토대의 붕괴는 외면한 채 개인의 우울증이나 심리적 나약함으로 책임을 전가해 온 국가의 방관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다.

청년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하청 등 완벽히 쪼개진 노동 시장과 기술의 발전으로 신입이 끝나는 등 겹친 악구도 속에 사회로 향한다. 안정적인 삶이라는 추상적 목표를 위해 청춘을 담보로 걸고 초경쟁에 뛰어들지만, 대다수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플랫폼 노동이나 불안정 노동으로 밀려난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무언가 얻고자 하나 악마는 파우스트와는 거래했어도 우리 청년들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어두운 사회의 단면에서 노동하다가 조용히 사고로, 스스로 죽어가는 청년들은 사회가 죽인 것이다.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싹이 도려내진 시대에 선택지는 도박과 포기밖에 없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으로 윽박지르기 쉽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이 겁박은 곧 착취당할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국가에 공급하라는 명령과 동일하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생존 투쟁과 굴욕을, 누군지 모를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서늘하고 이타적인 결단이 낮은 출산율로 이어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사람이 누리는 생애주기에서 국가가 요람에만 수백조 원을 쏟아붓는 동안 요람과 무덤 사이에 있는 청년들은 그 중간에서 나락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살아있는 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생명을 창조하라는 요구는 공허한 폭력이다.

정치는 표에 따라 지극히 공학적으로 움직인다. 쉽게, 인구가 적은 청년의 의사보다 표가 많이 되는 노년층에 정책과 자본이 집중된다. 표가 되지 않는 청년들의 생존 문제는 뒷순위로 밀려나거나 지극히 고리타분한 관점으로 다루어지기 쉽다. 여기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환경 속에서 청년 세대 내부조차 젠더, 학벌, 정규직 여부로 파편화되는 현상은 구조적 모순에 맞설 연대의 동력은 상실되었고, 실패의 원인을 오직 자신에게 돌리는 한 세대의 이른 종말을 뜻한다.

애도를 상실한 국가는 파국을 감당해야 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성장 지상주의와 기득권의 양보 없는 체제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구에 대한 국가주의적 망상을 버리고 어떻게 파국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짐을 함께 감당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미래는 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에게 도착할 것은 유예된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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