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관하여
너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누구나 받아봤을 법한 흔한 말이다. 질문이란 질문을 하는 사람이 편할수록 답하는 사람이 어려운 구조다. 많은 것을 뭉텅이로 편하게 질문하면 답하는 사람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아이들에게 일삼아 온 것이다. 꿈이 무엇이냐의 질문으로 돌아오면 응당 의사, 선생님, 판사, 과학자 등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명사의 직업을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꿈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선발 과정을 통과하여 직함을 얻게 되면 그것이 꿈의 완성인가? 현대 사회의 꿈은 도착해야 할 도착지나 이력서의 스펙으로 전락했다. 이는 꿈의 해상도를 떨어뜨리며 수단이 목적의 자리에 가게 했다. 꿈은 주머니에 넣고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명사로 된 꿈은 달성하는 순간 과거형이 되어 허무해진다. 의사가 되어 그 직업을 수단으로 어떤 가치에 복무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의사 자체가 목적이니 그것을 이룬 후의 깊은 상실감과 허무주의를 느끼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는 자크 라캉이 이야기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한 명사들을 좇다 보면 정작 내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싶은지에 대한 깊은 사유가 증발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단한 직업의식과 윤리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명사형 꿈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고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나를 실패자로 규정짓는 폭력성을 지닌다.
하여 꿈은 명사가 아니라 ‘~하는 중’이라는 동사여야 한다. 완성되지 않았음을 긍정하고, 매일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꿈이라 지칭해야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방황하며 나아갔듯이, 인간의 위대함은 완벽한 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걷고 지향하는가에 있다. 인간이란 계속 노력하고 움직이며 끝없이 방황하는 것이다. 동사형 꿈을 가진 사람은 결과를 초월하여 행위와 태도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이미 꿈을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고 과정을 긍정한다.
더하여 명사형 꿈은 목적지를 향한 전력 질주를 강요하지만, 동사형 꿈은 세상을 온전히 느끼며 걷는 산책과 같다. 걷는다는 것은 불안정한 상태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불안정함이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동사로서의 꿈 역시 끊임없이 흔들리며 균형을 잡아가는 걷기와 맞닿아 있다.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오늘 하루 한 뼘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사유하며 걷는 것. 이것이 가장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실천 방식이다.
꿈은 저 멀리 있어서 달려가 잡아야 하는 신기루가 아니다. 오늘 내가 내딛는 단단한 발걸음이 꿈에 더 가깝다. 현재 가지고 있는 꿈은 삶을 옥죄는 욕망인가, 아니면 삶을 자유롭게 하는 의지인가? 꿈 또한 프롬의 말대로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게 해야 한다. 결국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이다. 그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는 명사 대신 끊임없이 이어지는 쉼표와 펄떡이는 동사들로 삶이 직조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