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책을 읽는가

읽는 유희를 생각하다

by 안진

홈스쿨링을 시작한 2017년부터 작년 2025년까지, 햇수로 9년이다. 얼추 하루에 한 권꼴로 계산하면 3,000권이 넘는 분량이다. 물론 매일 한 권을 꼬박 채우지 못한 날도 있고, 반대로 몇 권을 몰아 읽은 날도 있으니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하지만 하루 한 권이라는 목표를 두고 살아왔으니, 지난 9년의 시간은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음이 분명하다.

스마트폰 하나면 세상의 모든 재미를 손에 쥘 수 있는 시대다. 굳이 종이 냄새를 맡아가며 활자를 읽는 행위는 이제 당연한 교양이라기보다 특이한 취미나 기이한 고집에 가까워 보인다. 문자 텍스트보다 자극적인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종이책은 점점 더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활자를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왜 이 종이 뭉치를 손에서 놓지 못할까? 3,000번이나 책 표지를 열게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시작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고, 이후 홈스쿨링을 하면서 책은 내게 남는 시간을 때우는 가장 만만한 도구가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절의 독서에는 지적 허영과 불안이 섞여 있었고 지금도 일면 그런 부분이 존재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또래보다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앞서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활자를 씹어 삼키듯 읽었다. 게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딱히 다른 취미도 없었기에, 책은 필자에게 도피처이자 유일한 성취의 수단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안쓰러운 시절이었다. 책을 온전히 즐기기보다,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읽은 책의 두께에 비해 내 안에 남은 문장의 깊이는 아쉬울 때가 많다. 3,000권이라는 숫자는 훈장이 아니라, 어쩌면 그만큼 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것에 서툴렀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강박의 시간을 지나오며 깨달은 것이 있다. 주변에 털어놓기 힘든 고민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결국 책상 위 펼쳐진 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책은 잔소리하지 않는 스승이었고, 묵묵히 들어주는 친구였다. 무의미하게 흘러갈 뻔한 시간 속에 닻을 내리게 해 준 것도 결국 책이었다.

이제 와서 "왜 읽는가?"라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왜 쓰는가>에서 답했듯 "그냥 좋아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쓰는 일이 생산자의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영역이라면, 읽는 일은 소비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작가가 뼈를 깎아 만든 세계를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마음에 드는 문장만 골라 담으며 누리면 그만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물론 좋은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쁜 글은 없다는 믿음처럼, 나쁜 독서도 없다. 엉성한 책에서는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를 배운다. 훌륭한 책에서는 질투와 경이로움을 배운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못 불러도 마이크를 잡고 즐거워하듯, 필자는 오늘도 골방에서 책을 펼치며 고독한 축제를 연다.

타인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는 하지만, 인생에서 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답하겠다. 책이 아니더라도 삶을 채울 수 있는 근사한 것들은 세상에 많으니까. 다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읽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누군가 써낸 문장이 시공간을 넘어 눈앞에 당도하는 기적, 그리고 그 문장이 사람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기어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게 만드는 그 순환이 여전히 좋다. 별 볼 일 없는 하루라 해도 책 한 권을 읽고 덮었다면, 그날은 누군가의 세계를 여행하고 무사히 귀환한 셈이다. 그것으로 그 하루는 특별하고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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