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란다 법칙

나는 그 질문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by 안미쌤

[미란다 법칙]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


범죄. 스릴러 장르를 즐겨보는 나는 저 문장을 본의 아니게 많이 접하게 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형사분들이 범죄자를 멋지게 제압하며 뒤로 수갑을 촥촥 채우며, 미란다 법칙을 내뱉을 때, 너무 멋져 보였다.




2016년도.

중2 남자 8명으로 구성된 반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반은 처음에 남학생 1명으로 개설된 반인데, 졸기만 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 않아 수학 점수가 50점도 안 나오던 아이가 나에게 수학+태도+인성 훈육을 받은 후로, 80점대 점수부터 시작해 90점을 넘기니,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니 점수 뭐냐? 어디 다니길래 니가 나보다 잘하냐?' 하면서 모여들어 결국 8명이 되었다.


처음엔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들이 친구 따라 와서 매번 지각에 과제도 엉망, 태도도 엉망이라 하나하나 바로 잡는 게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나마 마음 잡은 아이의 태도도 같이 흐트러질까 걱정되다 보니 그 반에 친구가 새로 등원한다 그러면 점점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그 아이의 친구가 신규생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부터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처음 보는 아이에게 "그냥 친구 따라온 거면 지금 바로 집으로 가!".


아무리 이 미친 세상 미쳐야 산다지만, 학생이 고객인 학원에서 이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지금도 졸업 후 성인이 되어 찾아오는 그 친구는 그날을 회상하며 "쌤! 그때는 진짜 황당했어요~ 근데 생각하면 진짜 웃겨요. 그런 대접 처음 받아봤어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나는 "그때는 진짜 너네가 공부할 마음도 없이 그냥 막 오니까 나도 모르게 너무 짜증이 나서 그랬어!!" 라며 멋쩍어하고, 우리는 박장대소하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다 문득 그때 그 반 학생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들의 질문을 잘 받아주지 않는다. '학원 선생님이 학원비 받고 질문을 안 받아주면 어떡하냐?'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고민 없이 하는 질문'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문제를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문제가 길다는 이유로 읽기 싫어서 하는 질문.

문제는 읽었으나,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고 어려워 보여서 하는 질문.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라, 비슷한 문제를 떠올려 암기해서 풀다가 막혀서 하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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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그 문제를 읽은 후, 적어도 배운 내용을 토대로 고민을 해보고, 식을 세워보고, 연구한 흔적이 있어야 질문을 받아준다.


그렇다고 내가 다 풀어주느냐? 절대 아니다.


질문을 한 학생에게 역으로 질문을 한다.


'그럼 이 문제에서 구하려는 게 뭐야?'

'지금 이 문제에서 사용되는 개념은 무엇일 것 같아?'

'이 조건은 왜 주어졌을 것 같아?'

'그럼 어떠한 식이 세워지니?'


생각보다 아이들은 나의 질문에 대답을 곧 잘한다.


이미 문제를 제대로 읽고, 고민을 한 상태에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대답을 못 할 질문은 없으니까.


그럼 아이들은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이제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풀어볼게요."라고 대답한 후, 답을 바로 낸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한 흔적이 있더라도, 누가 봐도 쉬운 개념 문제 이거나, 계산 실수로 인해 틀린 부분들이 보이는 문제는 스스로 고민해서 해결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너는 질문을 할 권리가 있고, 나는 그 질문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 문장을 자주 듣던 한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쌤! 그거 '안미란다 법칙'이에요?"라고 하는 거다.


나는 의아해 "안미란다 법칙? 그게 뭐야?"라고 했더니, "왜 그 미란다 법칙 있잖아요~ 범죄자한테 이야기하는 거! 쌤은 안미쌤이니까 '안미란다 법칙'이죠!"


범죄 스릴러를 하도 많이 보더니, 그 미란다 법칙이 나의 머릿속에 박혀 아이들에게 비슷한 어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나 보다.


센스 있는 아이들의 말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그 8명과 정말 지지고 볶으며 공부를 하고, 점점 태도가 좋아지는 아이들을 보며 뿌듯했고 감사했다.

그에 맞게 성적도 당연히 올라, 중3을 졸업할 때 그 반 평균은 95를 넘길 정도였다.


지금은 대부분 대학을 다니며 자신만의 꿈을 찾아 다시는 오지 않을 창창한 20대를 보내고 있다.


가끔 찾아오거나, 생일 혹은 스승의 날에 연락이 오면, '참 내가 독하게 혼내고, 잔소리도 많이 했는데..'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다.

그때는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내 진심을 알고, "그래도 쌤 덕분에 공부도 하고 사람 됐죠!"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울컥하기도 한다.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과거의 아이들이 더욱 그리운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인 것 같다.


KakaoTalk_20240824_144436382.jpg 2018년도. 아이들이 해준 생일파티.


[비하인드 스토리]


8명의 남학생으로 구성되기 전, 처음 그 반을 개설시킨 아이가 나중에 친해진 후 해준 이야기이다.


"쌤, 제가 왜 이 학원에 온 지 알아요?"


"아니? 왜 왔는데? 왜 와서 나를 괴롭히는 거니?"


"사실, 2층 수학 학원에 상담을 하러 왔었거든요? 근데 제가 그날 많이 졸렸어요. 그래서 너무 귀찮은 거예요. 그런데 1층에도 수학 학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온 거예요."


"뭐???? (이런!@#!!@$!)"


"그래서 덕분에 제가 지금 사람 됐잖아요! 저 이제 꿈도 있어요~ 꼭 요리 학과에 가서 셰프가 될 거예요."


"오~ 꿈이 있어서 다행이다! 쌤이 사람 만들어준 거 잊지 말고! 다 내덕이야~"


우리는 이 학원을 오게 된 황당한 일화에 그만 빵 터져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 아이는 고등학교도 요리 전문학교로 가서 수학은 쉬웠기에 계속 100점을 받았고, 결국 대학에 가서 본인의 꿈을 펼치고 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라며 직접 구운 쿠키도 가져왔었는데, 너무 기특하고, 감사했다.


내가 사람으로 만들어 준만큼 나에게도 '인내심'이란 것을 자라게 해 준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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