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펜의 무게

by 동작에서

초등학교때 비 내리는 시험지를 보는 것은 슬펐다. 그러면서 빨간펜을 들고 좍좍 줄을 긋는 선생님이 부러웠다. 사실 선생님이 부러웠다기 보단 빨간펜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끌렸던 것 같다.


대개 나는 빨간 펜으로 줄이 그어지는 쪽이었다. 첨삭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받는 존재. 위치의 차이, 실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빨간줄에 순응했다. 빨간펜이 손에 쥐어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빨간줄을 그을 자격이 있는 사람의 기분이 궁금했다.


작문 스터디를 할 때였다. 나에게 빨간펜을 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글을 평가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평가라는 것에 정확한 기준을 세우기도 전에 신나는 마음으로 빨간펜을 사러 갔다. 나에게 빨간펜을 쥘 수 있는 사람은 틀렸다고 지적해도 상대가 네 맞아요. 제가 틀렸습니다. 라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자격이 부여된 존재였기에.


첫 날. 바빠서 글을 못 써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빨간펜을 들 수 있었다. 과거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빨간펜을 들고 밑줄을 막 그었다. 좍좍. 강렬한 색깔도 좋았고, 긋는 느낌도 좋아서 동그라미, 엑스, 세모를 빠르게 남발했다. 내가 생각하는 첨삭의 잔상은 이런 것이었다.


남의 글에 밑줄을 긋고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내 글을 썼다. 대략 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부푼 마음으로 지인에게 보여줬다. 반응이 궁금했다. 2장 남짓한 글을 읽을 2분도 안되서 읽더니 “괜찮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단 한 마디뿐이라니, 3시간이 걸렸는데.


지인의 한 마디는 내가 아까 신나게 그은 빨간펜이었다. 남의 글에 담긴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는 태도가 꼭 닮아 있었다. 지인의 반응은 순전한 나의 느낌이기에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의 빨간펜은 그랬다. 그런 마음이었다.


의미를 제대로 곱씹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빨간 펜촉을 댄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큼지막한 엑스를 그린 그 문장을 쓰기위해 상대는 100번을 고민하고 101번의 백스페이스를 눌렀을지도 모른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시간에 빨간펜을 댈 자격이 나에게 있었을까. 글을 써보니 알았다. 빨간펜을 드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님을, 가벼운 일이 아님을.


남의 글에 빨간펜을 그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라서, 나이가 많아서, 글을 더 잘써서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 사람은 먼저 완벽한 문장 뒤에 숨겨진 노력을 존중하고 헤아리는 사람이다. 아를 쓸지 어를 쓸지, 마침표를 찍을지 물음표로 끝낼지 고민하는 상대방의 그 작은 순간들까지 말이다. 빨간펜을 들 자격은 꽤 까다롭다.


상대를 향한 빨간펜이 너무 무거워서 나는 이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차분한 검은펜으로 또박또박 체크한다. 그리고 읽기 전에 한번 숨을 고른다. 빨간펜을 들 자격을 갖추려 노력하는 중이다. 빨간펜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때 다시 들어야지 생각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항상 빨간펜의 무게보다 상대방의 고민의 무게가 더 무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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