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도 선글라스를 써

재택근무 권태기 탈출을 위한 방구석 기행

by anna

처음엔 편한 게 마냥 좋기만 했다. 재택근무하는 호사를 제대로 누려보겠다며 옷차림을 부러 엉망으로 하고 있기도 했다. 잘 때 입는 실내복 또는 운동복 차림으로 노트북 앞에 앉는 게 보통이었고 한여름 더위가 기승일 땐 밖에 나갈 땐 절대 안 입는 브라탑에 짤막한 레깅스를 입고 있는 날도 있었다. 수시로 쉬는 시간을 만들어 하루 몇 잔씩 커피를 마시고 간식도 심심하면 먹어 재꼈다. 익숙한 내 집에서,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물리적인 리듬을 맞출 필요 없이 혼자 일하다 보니 자유와 방임 그 사이에 놓여있다는 말이 딱 맞았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되지만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 재택근무였다.


회사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다 좋은데 너무 긴장감이 없어서 스스로 고삐를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누군가 회의 중에 '재택근무 중이 어려운 점은 없나요?' 하고 묻자 너도나도 단조로운 일상, 느슨한 태도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재미 삼아 각자 재택근무의 권태로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경험 또는 노하우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다. 그때 나는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1. 옷을 갈아입는다.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고 또 입는 날이 많았는데(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이 아니고선 옷에 뭐가 묻어야 다른 옷을 꺼내 입었다.) 안방 건너 드레스룸에 가 평소 안 입던 옷을 꺼내 입는 것이다. 마치 출근하는냥. 맨투맨 셔츠 대신 단추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운동복 바지나 허리 넉넉한 청바지 말고 정장 바지를 꺼내 입었다. 어떤 날은 드레스 커버에 들어 있던 결혼식 예복 원피스를 꺼내 입기도 했다. 몇 번은 재미있었지만 옷만 구겨지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2. 선글라스를 쓴다.

비록 방구석 벽 앞에 노트북 두고 앉아 있는 처지이지만 여기가 노천카페인 것처럼, 휴양지 햇볕 아래 눈부심에 맞서 일하는 워커홀릭 커리어 우먼처럼 선글라스를 꺼내다 썼다. 눈이 침침하게 느껴지면 머리 위로 슥 올려 걸쳐두기도 했다. 한때였지만 이 방법이 아주 효과가 있었다. 없던 일도 만들어할 듯이 일에 상당히 몰입할 수 있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 얘길 했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나보고 정말 왜 이러냐고 했다. 그제야 '아주 발버둥에 발악을 하는구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방법이었다. 기행이라면 기행이겠지만.


3. 방 안 향기를 바꾼다.

공간을 새롭게 가꾸고 싶지만 매번 인테리어를 하거나 가구 구조를 바꾸거나 하는 건 할 수 없었다. 왜인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인센스 스틱으로 도배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별 걸 다 샀다. 인센스 스틱을 사면 거치대와 같은 홀더를 안 살 수 없었다. 페루에서 온 나무토막 모양의 팔로산토라는 게 있어서 그것도 사고 향초를 사니까 캔들라이터가 따라왔다. 교보문고 룸 스프레이도 샀다. 처음엔 제법 기분전환이 됐는데 자꾸 하다 보니 방에 산소가 부족한 것 같았다. 이것저것 태우고 뿌려서인지 남편은 끝방에서 어르신 냄새가 난다고 했다. 요즘은 폐 건강이 염려되어 교보문고 룸 스프레이만 드물게 사용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재택근무 하면서 권태를 느끼는 건, 덜 바쁠 때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땐 권태가 무어나 머리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시달리느라 지루하고 뭐 할 틈이 없다. 사무실이고 아니고간에 할 일이 넘쳐나면 빤스바람에라도 척척 해치워야 하는 것이 직장생활이니까.


재미있는 것은 재택근무의 권태를 견지지 못하고 출퇴근하는 직장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난 돌봐야 할 아이가 있고, 남편과 경제 공동체이니 수입에 대한 책임을 나눌 수도 있고 무엇보다 성장보다는 안정과 안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시 출퇴근하는 삶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정년까지 이 회사에 충성한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20대, 30대 친구들은 출퇴근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단절로 느껴지곤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온라인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루 한 마디도 육성으로 내지 않는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느슨하기보단 좀 빡빡한 것이 아무래도 직장생활의 맛일지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회적인 인정을 쟁취하고 싶은 욕구, 너무나 깊이 공감하고 내 사회 초년생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나저러나 남는 사람에겐 남는 이유가, 떠나는 사람에겐 또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끝방 내 책상 위엔 늘 선글라스가 놓여 있다. 블루라이트 차단을 해주는 기능이 있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전보단 쓰는 횟수가 줄었지만 선글라스 렌즈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응, 열심히 해라' 혼자 격려의 말을 한다. 화이팅 하라고. 아무도 안 보고 있어도 부지런히 일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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