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은 11시 50분부터

최고의 복지는 정오샤워

by anna

출퇴근하는 직장생활 할 때도 12시 땡 하고 밥 먹으러 나가진 않았다. 11시쯤 되면 그때부터 동료들과 메신저로 어디 가서 뭘 먹을지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고 11시 45분쯤이 되면 슬금슬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커피를 사서 들어온다는 핑계로 10분 15분쯤 늦게 자리에 돌아오는 거, 나만 그랬던 건 아니겠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열두 시부터 점심을 먹기로 마음먹었으면 10분 전부터 냄비에 물을 담아 인덕션에 올려둔다. 그나마 메뉴 고민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5일 중 3일가량은 파스타를 해 먹기 때문이다. 우선 난 소문난 면 러버다. 면 종류라면 차고 뜨거운 것,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 또 혼자 먹는 한 끼를 매일같이 차려내는데 파스타만 한 게 없다. 면만 삶아두면 토마토, 오일, 크림 중에 소스를 하나 고르고 새우나 닭가슴살 또는 베이컨 중에 그날그날 땡기는 걸 대강 넣으면 완성된다. 소스도 힘들이지 않고 대기업 로고가 큼지막하게 붙은 시판 소스를 쓴다. 별다른 반찬도 필요 없으니 거추장스럽지도 않고 설거지할 것도 몇 개 안 나온다. 집에서 만든 파스타는 매번 맛이 다르다. 아무리 자주 해 먹어도 늘 양 조절에 실패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알단테라는 식감은 절대 경험할 수가 없다. 어떤 날엔 냉동 해물믹스를 넣고 오일파스타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도 맛도 흡사 제부도에서 먹는 바지락 칼국수와 같았다.


푸짐한 파스타를 얼른 한 그릇 해치우고 나면 부를 배를 통통 두드리며 소파에 눕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택근무 하면서 눕는다? 그날은 망하는 것이다. 설거지는 퇴근 시간인 오후 6시 이후로 미뤄두고 나는 샤워를 한다. 재택근무 최고 복지를 손꼽으라면 점심시간에 하는 샤워를 빼먹을 수 없다. 아침엔 대체로 좀 헝클어진 모양새다. 세수는 꼭 하는데 그게 전부다. 출퇴근하는 삶일 땐 헤어 스타일을 위해 아침에 늘 샤워했는데 집에서 일하면서는 아침에 머리 감은 적이 있던가. 글쎄, 한 계절에 한 번쯤은 그랬는지도 모른다. 출근하는 남편, 등원하는 아이에게 화장실을 양보하고 난 눈곱만 떼면 모든 준비 완료다. 분주한 아침에 서둘러 씻는 대신 점심시간에 하는 느긋한 샤워를 즐긴다. 양치하는 동안 뜨거운 물을 팡팡 틀어 샤워 부스 안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면 지성 두피인 걸 고려해 샴푸 거품을 내고 헹구는 걸 두 번 반복한다. 트리트먼트를 머리끝에 듬뿍 발라둔 채 세안을 하고 몸도 구석구석 박박 문질러 닦는다. 생각해 보니 청소년기 이후 이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낮시간에 샤워를 해본 기억이 없다. 등교, 출근에 쫓겨 매일 아침 전쟁같이 물과 거품을 뒤집어썼다 헹구고 나간 게 씻고 다녔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옷을 입고 로션을 바르며 시계를 보면 얼추 열두 시다. 그럼 노트북이 있는 끝방으로 가 그 사이 온 새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한다. 높은 확률로 없다. 설령 있다 해도 당장 회신을 요구하는 그런 일은 드물다. 밖에서 일할 때처럼 10분쯤 늦게 자리에 앉을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사이에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햇빛을 직접 쬐는 일은 없지만 창문을 통해 자외선이 들어오는 걸 감안해 선크림도 바르고 커피 내리는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개운한 상태로 자리에 앉으면 어쩐지 눈앞이 한층 밝고 깨끗하게 보이는 기분이다. 어떤 날엔 새로 태어난 기분마저 든다.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을 할 땐 일주일을 평일과 주말, 이분법으로 살았다. 요즘은 하루를 점심시간 전후로 나누어 지내다 보니 시간을 번 기분이다. 늘 집에 있는 일상은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 한 달을 돌이켜보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떤 날은 오전 내내 허투루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데, 찝찝한 마음이 들어도 낮시간의 샤워를 마치고 자세를 고쳐 앉으면 남은 오후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기운이 솟아난다. 이렇게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난 이른 아침에 샤워하기 위해 부지런 떠는 건 진작 관두고 늦은 기상을 즐기며 좀 꾀제제한 얼굴로 또 아침을 맞이하는데... 계속 이래도 되는 걸까 가끔은 생각하고... 그래도 역시 재택근무 최고의 복지는 정오샤워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으며... 느슨함과 정신승리를 즐겨본다.

작가의 이전글집에서도 선글라스를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