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 하트 영호
엄마는 스물셋, 꽃보다 더 아름다운 나이에 나를 낳았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아빠는 스물일곱이었다. 어린 부모는 아이가 돌이 지나서야 겨우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와 네 살 터울인 동생이 엄마 뱃속에 자리 잡았을 때, 우리 가족은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왔다. 없는 형편에 나를 키우느라 겨우 떠난 늦은 신혼여행이었지만 네 가족이 함께 했던 첫 여행이라 더 의미가 깊었고, 빛바랜 사진 앨범 속 우리 가족은 참 단란하고 보기 좋다.
올해는 부모님의 결혼 30주년 기념 해이다.
그동안 엄마, 아빠는 바쁜 일상에 치여 한 번도 두 분이서 제주도 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싶었던 나는 제주도 중혼 여행을 준비했다. 고사리가 돋아나는 봄의 계절에 엄마, 아빠를 내가 사는 이곳 제주도로 초대한 것이다. 동생도 함께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이 바빠 이번에는 여행경비를 지원해 주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했다.
날이 따스하던 4월의 어느 토요일, 부모님을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던 설렘을 기억한다. 우리는 첫 일정으로 함덕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가볍게 바닷가 산책을 하고 바람 부는 밭, 보롬왓으로 갔다.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보롬왓에서는 계절마다 다양하게 가꾸어진 꽃들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방문한 시기에는 튤립과 삼색 버드나무가 피어있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부모님은 사이가 좋다. 물론 까탈스러운 어머니에게 최대한 맞춰주는 아버지가 있어 가능한 사이지만, 일정 내내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부모님의 곁에서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성산일출봉에도 잠시 들렀는데, 비록 마감 시간이 겹쳐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거센 바람을 맞으며 함께 바라본 풍경은 예술이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살던 동네인 삼양으로 돌아와 흑돼지에 술 한 잔 걸치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꼬꼬마 울보였던 내가 어느새 다 커서 엄마, 아빠의 가이드 겸 사진사 겸 운전기사 겸 말동무가 되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둘째 날은 어머니가 가장 학수고대하던 고사리 채집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승악 오름으로 원정을 나섰는데 어릴 적 시골에 사셨던 두 분의 손길은 역시 남달랐다. 30분 만에 봉지 한가득을 채웠지만 엄마는 떠날 줄을 모르고, 한 시간 정도 더 시간을 보낸 뒤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정을 마쳤다.
이날은 엄마의 음력 생일이라 성게 미역국을 먹으러 수요 미식회에 나왔다던 유명한 식당에 가서 가벼운 축하 인사를 나눴다. 식사 후 천지연 폭포에 간 우리는 부모님의 신혼여행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추억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이런 걸 왜 하냐며 어색해하던 두 분도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하셔서 재미있었다. 가볍게 미션을 성공하고 집에 돌아와 수확한 고사리를 삶아 말려놓고, 배낚시를 하러 차귀도에 갔는데 웬걸.
우리 가족은 똥 손이었다.
두 시간가량 엄마와 아빠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나는 작은 고기 두 마리를 낚아냈다. 낚시를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금능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엄마와 내가 모래사장에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과 우리 셋이 바다를 배경으로 돌 위에 서서 찍은 사진까지 복사를 완료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싱싱한 고등어 회에 (부모님만) 소주 한 잔 걸치고 둘째 날 일정이 끝났다.
셋째 날은 아쉽게도 비가 내렸지만 우리의 열정을 꺼뜨릴 수는 없었다. 우럭 조림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비자림으로 간 우리는 우비를 갖춰 입고 천천히 숲을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여행에서 어머니와 가장 대화를 많이 한 순간이라 기억에 남는다.
비자림 투어를 마치고 제주 전통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투어를 하며 간식으로 오메기떡과 빙떡을 사 먹었고 대망의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동생의 두둑한 용돈 덕분에 제주에 살면서 한 번도 내 돈 주고 사 먹어본 적이 없는 통 갈치구이를 먹었는데 정말 배부르고 등 따신 밤이었다.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넷째 날 아침. 하늘도 내 서운한 마음을 아는 건지 흐린 날씨였지만 집 근처 원당봉에 오르며 나름 활기찬 하루를 시작했다. 하산 후 뜨끈한 고기 국수로 몸을 데우고 우리는 마지막 미션 장소인 용두암으로 향했다.
26년 전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어려서부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의 곁에서 언제나 믿고 맡기는 첫째 딸이었던 나는 자연스레 자기 주도성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안고 살아왔다.
언제나 내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주신 부모님이 계시기에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만큼 가족들에게 의지하는 방법은 몰랐던 것 같다.
그러던 내게 3년 남짓의 타지 생활은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에서 함께 보낸 3박 4일의 시간 동안 부모님과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어 진심으로 기뻤다. 언젠가 이번에 남긴 추억에 새로운 기억을 더할 그날을 기다리며,
"사랑하는 우리 가족 제주에서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