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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Dec 14. 2023

모임이 사라지는 이유

2023.12.12

최근에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하야 <은지모임> 말 그대로 은지들을 모으는 거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사실 내 이름 ‘은지‘가 싫었던 은지다.


학창 시절 나는 반에서 유일한 은지가 아니었다. 항상 나와 다른 은지가 존재했고, 선생님과 친구들은 은지들의 특성에 맞게 큰 은지, 작은 은지 등으로 나눠 불렀다.


나는 은지 앞에 수식어를 붙여야 하는 게 싫었다. 그나마 성이 특이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은표라고 부르셨는데, 그건 더더욱 싫었다.


은지라는 내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은혜은, 뜻지. 딱히 의미도 없다. 그냥 한자가 쓰여있는 책받침을 보고 지어주신 거라고 하셨다.


성인이 되면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 이름이란 건 모름지기 특별하고 특이해야 예쁘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은지라는 이름이 좋아지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이름이 참 예쁘다”라고 했다. 은지의 은을 거꾸로 돌리면 긍이 된다고, 긍지를 가지고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말장난 같던 그 말이, 은지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로 난 긍지라는 닉네임을 쓰며 내 이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은지들은 뭐 하고 살까?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은지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렇게 은지모임을 만들었다.


11월 11일에 모집공고를 올리고, 커뮤니티에 홍보를 하고, 주변에 알던 은지들에게 연락을 했다. 처음엔 “아무도 가입을 안 하면 어떡하지?“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임은지 님과 김은지 님께 먼저 연락이 왔다.


12월 12일 저녁 7시, 은지들을 만났다. 나는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간단한 피피티를 만들고, 가입 선물을 준비했다. 우리는 서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고, 모임의 취지를 나누고, 함께 모루인형을 만들었다.


다행히 은지 2호님과 8호님 두 분 다 술을 좋아하셔서 간단한 뒤풀이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은지님, 은지님 하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숫자로 구분하긴 했지만, 결국 우리는 은지다.


은지모임을 기획하고 홍보하니 주변 사람들이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모은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면서. 자신의 이름이 은지가 아닌 것에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 모임이 진정으로 오래가길 바란다.

제주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전국에 사는 은지들을 모아서 서로의 취향을 나누고 함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다. 내년 연말에는 ㅇㅈ모임을 할 거다. 이름에 이응이나 지읒이 들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1년 동안 진행한 은지모임을 회고하고, 나누는 연말 파티를 여는 거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가입해 있던 모임이 사라진 날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던 독서모임이었는데, 따로 모임 이름이 있지는 않았고 그냥 독서모임이었다. 몇 해 전 지인의 추천으로 모임의 게스트로 나갔다가 멤버가 된 케이스였다.


독서모임의 장점은 아무래도 책을 읽는다는 거였다. 나는 어느새부턴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어른이 되어있었지만, 누구보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임의 멤버는 약 열명 정도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호스트가 되었다.


구성원의 직업도, 나이도, 관심사도 달랐기에 매번 새로운 책들을 읽게 되었다. 나는 이점이 좋았다. 독서마저도 편식하는 나로서는 스스로 전혀 고를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억지로라도 읽어야 하는 과정이 스트레스 보단 즐거움이었다.


물론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모임에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좋았다. 호스트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 달의 모임을 이끌어갔으며, 우리는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감정을 나누었다. 소소한 간식도 함께 말이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니 더더욱 장점밖에 없었는데 왜 사라졌냐고? 모이질 못해서다. 월 1회 모임이라 미리 날짜를 정하는데, 보통 평일 저녁이었다. 월화에 쉬는 나는 휴일과 겹치는 날이면 가능한 참석 하려 했고, 다른 분들은 퇴근하고 오는 거였다.


그런데 지난 10월 말 모임이 인원 부족으로 한 달이 밀리고, 11월 말 모임도 성사되지 않으면서 어느샌가 아무도 “모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모임 당일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참석하지 못한 적이 더러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엊그제 은지모임 뒤풀이를 하던 날 문득 이 독서모임이 떠올라 메시지를 남겼다. 연말모임은 안 하냐는 물음이었고, 카톡방 멤버 10여 명 중 답변은 딱 한 분에게 왔다.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 달에도 못 모이겠네,라고 생각하던 중 어젯밤 모임 멤버 한분이 운을 띄웠다.


“다들 바쁜가 보네요, 월 1회 모임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 같군요. 우리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모임을 정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혼자 나가기 미안해 의견 내 봅니다.” 지금은 이미 카톡방을 나온 뒤라 정확한 문장은 아니겠지만 그분의 메시지는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나도 동감의 뜻을 전하고, 멤버들은 하나 둘 아쉽고 죄송하단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정리되는 것이 아쉬워 그래도 마지막 모임을 추진해 볼까, 도 잠시 생각했지만 달력을 보니 이번 달엔 나도 꽤나 바쁘다. 사실 우리는 바쁘다는 말이 결국엔 핑계라는 걸 안다.


오늘 아침, 하나 둘 단톡방을 나갔고 나도 인사를 전하고 조용히 나가기를 눌렀다. 순간 모임이 해체되면 단톡방을 꼭 폭파시켜야 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들었지만 말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어쩔 수 없다는 말속에는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이끌 수는 없다’는 의미가 들어있기에.


언젠가 은지모임도 이렇게 정리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모임이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알지만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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