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의 안나 D+2
간밤에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는 어제보다 더 선선하다. 오빠가 파리로 날아오는 중이라 신나기도 하고, 살짝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더 졸린 것 같기도. 한인민박은 아마 다신 가지 않을 것 같다. 밥도 맛있었고 주인아주머니도 친절하셨지만 공용으로 쓰는 공간들이 이제는 너무 불편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Pasteur 역에 내려 약속 시간까지 커피나 한 잔 할까 했는데 이게 웬 걸? 풍경이 너무 낯설었다. 하숙집을 바로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다. 역에서 위로 가야 하는지, 아래로 가야 하는지조차 말이다. 결국 커피와 여유는 포기하고 한식당 미수를 찾아갔다. 예전에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참새와 방앗간’ 자리라는데, 이것도 기억이 날 리가 있나.. 구글 맵을 보며 동네를 걷는데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식당에 도착해 워크인으로 예약을 하고 다시 동네를 걸었다.
10년 전에 박사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보고 겨우 주소를 알아내 다시 구글맵에 의지해 걸었다. 1층에 식당이 있었던 거 빼고는 외관은 전혀 기억이 없어 집 앞에 당도하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여기가 맞는 거... 같긴 한데... 다시 보니 집이 정말 크고 예뻤다. 아니 웅장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멀리서 사진을 찍고 그늘에 앉아 박사님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12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이윽고 하늘색 카라티를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걸음걸이와 한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 바로 박사님인 걸 알 수 있었다. 몰래 따라가는데, 잉? 우리가 만날 식당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다. 약속 시간은 10분 여가 남은 상태라 미행(?)을 포기하고 그냥 다시 식당으로 갔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는데 식당으로 그가 들어왔다. 하늘색 카라티! 아까 본 할아버지는 박사님이 맞았다. 그의 손에는 Pierre Herme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무려 10년 만에 만난 우리는 반가움에 포옹을 하고,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내가 박사님의 집에 하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와이프인 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녀는 치매도 앓고 있었다. 나는 하루 세 번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간호사가 올 때 보조를 하는 역할로 그 집에 얹혀살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명절이나 새해에 연락을 드릴 때면, 선생님(할머니)도 잘 계신지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니 지난 2019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이라는 문장을 쓰고 싶었지만 박사님은 참 많이 늙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집에는 하숙생이 둘이나 있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외롭다고, 선생님이 그립다고 하셨다. 타국에서 50년 이상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그것도 혼자. 나는 감히 그의 기분을 헤아릴 수 없어 작은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 박사님께 드릴 선물을 사 갔는데, 명인이 만든 고소리술이었다. 귀한 거라 강조하니 다행히 좋아하셨고, 내가 하숙생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주도에 살아서 좋겠다고, 결혼은 언제 하냐고 물으시길래 내년 가을쯤 할 예정이고, 초대할 테니 제주도에 놀러 오라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생각해 보니 10년 전 함께 살 때는 주인집 할아버지와 하숙 학생의 관계여서 같이 사진 찍을 일이 없었다. 지나고 보니 아쉬워 이번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챙겨갔다. 식당 종업원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여 우리는 오늘의 만남을 기념했다. 박사님 집 앞에서 사진을 또 찍고, 비쥬를 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삶이다.
오전에 아빠는 파리올림픽 여자 농구 경기를 보러 갔다. 세르비아 대 호주 경기였는데 무려 240유로짜리 티켓이었다. 구매자는 동생이었지만 해당 경기에 딱히 관심이 없던 터라 아빠에게 기회를 넘겼다. 아빠는 열심히 응원했고 중계 카메라에 잡혀 전광판에도 나왔다고 한다. 현지 중계 채널을 봤다면 타국에서 신나 하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우리는 16구의 한식당에서 만나 벌집 삼겹살을 먹었다. 파리에 와서 계속 한식만 먹고 있는 우리가 웃겼다. 소주는 무려 15유로였고 삼겹살은 뻣뻣했다. 밥을 먹고 아빠와 규한은 몽파르나스로, 나는 짐을 챙기러 숙소에 갔다. 이틀 동안 잘 먹고 쉬었던 민박집주인아주머니께 챙겨간 손수건을 선물로 드리고 왔다. 남은 기간 동안 아버지와 동생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거운 캐리어를 이끌고 지하철 7호선과 9호선을 타고 새로운 숙소로 갔는데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왜 살고 싶었던 것일까? 여행 중에 자꾸 지난날의 내가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관대했으며, 긍정적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새로운 숙소는 부촌에 위치한 아파트였고, 동네가 참 조용하고 예뻤다. 집 내부도 크고 깔끔했다. 무려 1박에 48만 원짜리니까.. 당연히 좋아야 했다. 주인분께 키를 받고 숙소 내부 설명을 들은 뒤 간단히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준영이 파리로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RER C를 타고 생미셸 역에 내려서 RER B로 환승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의 낑겨 탔는데 파리 지하철 특유의 꿉꿉함과 사람들의 시큼한 체취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났다. 으, 인천 공항철도 타고 싶어.
공항에 도착해 잠시 길을 잃었지만 이내 입국장을 찾았다. 오빠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우리가 진짜 파리에서 만나다니!’ 혼자서 열네 시간 비행을 견딘 준영은 수척해진 얼굴로 나왔다. 평소 제주에서 서울 가는 한 시간 비행도 힘들어하는 그인데, 나를 보러 이 먼 곳까지 와주다니 정말 고마웠다. 우리는 바로 예약해 둔 픽업 택시를 타고 숙소로 왔다. 간단히 짐을 풀고 동네 식당에 갔는데 맛도 서비스도 별로라서 자세히 쓰고 싶진 않다. 나름 제주에서 서비스직을 하고 있어 그런지 이제 프랑스식 서비스에 성이 안 찬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에서 어쩐지 불합리만 보이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