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의 안나 D+6
어제 무리하지 않고 일찍 잠들길 잘했다. 오늘은 9시부터 스냅 촬영이 있었는데, 준영과 둘이 찍는 사진이었다. 사실 세미웨딩 느낌을 내고 싶어서 소품으로 면사포까지 사서 갔는데 막상 들고 가려니 살짝 오반가..? 싶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장소는 어제 가족들과 스냅을 찍었던 비르하켐다리였는데, 오늘도 마라톤 경기가 이어져 통제 중이었다. 다행히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통제가 풀리길 기다릴 수 있었다. 작가님은 여자분이셨고, 30분짜리 스냅인 건 똑같았지만 필름 감성을 내주신다고 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우리는 다리 위와 아래 곳곳에서 손을 잡고, 걷고, 서로를 바라보고, 뛰고, 웃었다. 날씨가 어제보다 더 더워서 이른 시간인데도 햇볕이 뜨거웠다. 30분도 이렇게 지치는데 나중에 웨딩 스냅은 어떻게 찍지..?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촬영 후 목적지는 원래 라파예트 백화점이었는데 일요일이라 오픈 시간이 11시였다. 시간이 좀 남아 배도 채울 겸 (지하철을 한 정거장 먼저 내려) 프렝땅 백화점 앞에 있는 카페로 갔다. 나는 닭고기, 준영은 누뗄라와 바나나가 들어간 크레이프를 골랐다. 커피 두 잔을 시키니 점원이 “아메리카노?”라고 묻더라. 그냥 에스프레소를 달라고 했다. 파리가 아니면 먹을 일이 없으니까. 생각보다 크레이프 크기가 커서 놀랐다. 절반 정도 먹으니 배가 불렀다.
계산을 하고 나와 프렝땅으로 갔다. 10시 57분에 문을 여니 가드가 “3분 뒤“ 오라고 했다. 우리는 딱 11시에 맞춰 입장을 했고 바로 루이뷔통 매장으로 갔다. 살면서 한 번도 명품백을 사본 적이 없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엄마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는 보통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쇼핑, 화장, 꽃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기에 명품도 당연히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작년 친가 가족모임에서 넷째 큰엄마의 구찌백을 보고 “그래도 하나쯤 있으면 좋지”라고 말하는 것에 놀라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다. 솔직히 엄마가 명품백을 들면 얼마나 들겠나, 그래도 정말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만 한 디자인으로 미리 골라갔다.
한국 공식 홈페이지 가격은 250만 원이었고, 기준이 없으니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누가 봐도 <나 루이비통이야>라고 보이는 가방이라서 골랐다. 명품 쇼핑은 처음이라 왠지 설렜다. 자연스러운 척(?) 매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분이세요?” “네!!!” 파리 프렝땅 백화점 루이비통에는 30년째 파리에 살고 계시는 한국인 여성 셀러가 있다!!!
그녀는 아주 친절히 가방을 보여주고 사용 시 주의사항 등을 설명해 주었다. 한 가지 놀란 점은 가방이 접혀 있었다는 건데, 가죽이 아니라 면 재질이라 주름은 금방 펴진다고 하더라. 다만 끈은 가죽 재질이라 물 같은 것이 묻으면 변색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결제는 현금 300유로, 나머지는 카드로 했고 가격은 1,550유로였다. 대충 환율을 1,500원이라고 치면 230만 원 정도 하는 거라 확실히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저렴했다. 여기에 텍스리펀 12%까지 받으니 꽤 살만한 가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규한이가 100만 원을 낸다고 하여 마음이 더 가벼웠다.
가방을 사고 나오니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센 강 런치크루즈를 예약해 둔 터라 바로 이동해야 했는데 센스 있는 셀러분께서 프렝땅 백화점 쇼핑백에 한번 더 담아주셔서 소매치기 걱정은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놀란 점은 올림픽 때문에 거리에 경찰과 군인이 정말 많았고, 그래서인지 집시는 단 한 명도 못 봤다. 확실히 전보다는 치안이 나아진 것을 느꼈다. 물론 한국처럼 마음 편히 삼각대를 펼쳐 놓고 사진을 찍는다거나,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나 지갑을 두고 자리를 비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배에서 밥을 먹다니, 신이 났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서 그런지 분위기도 활기찼다. 생각보다 이번 여행에서 한국사람을 많이 못 봤다. 바토무슈 배 중 하나였고, 이곳의 서버들은 파리에서 만난 그 어떤 서버보다 친절했다. 우리가 예약한 코스에는 식전주인 kir 1잔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한 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려 한국어 메뉴도 제공되었는데 어색한 번역이 귀여웠다. 전식은 내가 파리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이 이상했고, 본식도 그저 그랬다. 치즈도 나왔는데 오빠가 화장실 타일맛이라고 표현해서 난 먹지 않았다.. 디저트가 가장 괜찮았는데 사실 분위기 값이라고 생각하여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와인을 혼자 반 병이나 마신 준영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는 와인 시음 투어를 신청해 두었는데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우선 짐을 숙소에 두고 샹젤리제로 갔다. 파리올림픽 공식 굿즈샵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도착하니 줄이 어마어마했다. 날씨도 너무 더워져 이미 지친 상태였다. 결국 구경을 포기하고 바로 시음투어 장소로 갔다.
소믈리에 한 분이 총 여섯 가지의 와인에 대해 설명해 주고, 직접 마셔보는 투어였다. 5-6팀 정도 함께 했는데 동양인은 나와 준영, 그리고 옆의 일본인 부부뿐이었다. 확실히 서양 사람들은 서로 말 거는 게 익숙해 보였다. 나는 굳이 내 짧은 영어실력으로 소통하고 싶지 않아 와인에 집중하였는데, 점점 흥이 오른 준영이 옆자리 일본인에게 말을 걸었다. 와인을 마시면 마실수록 공간의 소음이 커졌다. 다들 취해서 말미엔 엄청 시끄러워졌는데 그 상황이 재미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일랜드 일행과 짧은 대화를 한 뒤 우리는 가장 먼저 그곳을 빠져나왔다. 준영이 얼굴이 더 빨개졌다.
저녁을 먹기 전 간단히 쇼핑을 하기 위해 몽마르트르에 갔다. 가족들과 동료들에게 줄 비누를 사고, 열쇠고리도 골랐다. 12개에 5유로면 한국에서 한 개에 천 원씩만 팔아도...?라고 생각했다가 이곳이 파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술기운에 피곤해진 준영은 힘이 없었고 나도 내가 짠 아주 완벽한 이 일정에 지쳐가고 있었다.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에펠탑 근처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사실 둘 다 피곤해서 ‘배달의 민족’이 절실했지만, 파리의 마지막 밤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구글 지도로 평점이 좋은 식당을 찾아갔는데 분위기도 맛도 좋았다. 다만 준영의 눈이 점점 감겨가고 있어 얼른 배를 채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12:55에 켜지는 화이트 에펠을 못 보고 온 것이 아쉬웠지만 사실 나도 피곤했다. 낭만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곳은 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