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로 읽는 한 사람의 삶

소위 김하진 에세이집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by 혜솔

브런치에 연재되던 글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에는 묘한 반가움이 있다. 익숙한 문장이지만, 더 이상 흘러가지 않고 머물 자리를 얻었다는 안도감.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를 받아 들었을 때도 그러했다. 표지는 몽롱한 하늘빛 위로 별들이 흩뿌려진 듯한 그림이다. 그 안에 담긴 글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떠 있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소설가 소위 작가는 부사를 삶으로 초대한다.
‘너무’, ‘결코’, ‘제발’, ‘억지로’ 같은 부사어는 문장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아왔지만, 이 책에서는 중심이 된다. 부사는 상황을 꾸미는 말이 아니라, 삶이 감당해 온 온도를 드러내는 언어라는 듯이. 부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나는 누구인가.'
작가는 그 물음으로 숨바꼭질을 하듯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라는 존재에 좀 더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가 '나'를 찾는 여정에서 탄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는 문법적 품사로 시작하지만, 곧 삶의 기록으로 방향을 튼다. ‘지금’, ‘이토록’, ‘가끔’, ‘또다시’, ‘무심코’, ‘혹시’, ‘당연히’, ‘반드시’, ‘과연’등, 그리고 마지막 ‘마침내’까지. 부사 하나마다 한 장의 생이 놓이고, 그 생은 설명이 아니라 체온으로 읽힌다.

그러나, '무턱대고'의 안타까운 사연을 읽고는 오늘의 작가가 되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가 되겠다고 무턱대고 수녀원으로 마음을 정하곤 속세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가던 서른두 살의 작가는 결국, 수녀가 되지 못했다. 무턱대고 가볼 수도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성소의 부르심은 오직 기도로만 응답받을 수 있는 곳이다. 수녀는 되지 못했지만 무턱대고 했던 그 질주로 인해 진짜 '나'로 태어 날 수 있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부사를 따라가며 새삼 느꼈다. 정말 부사가 없는 삶은 없겠구나 하고.


‘지금’은 붙잡고 싶은 순간, ‘이토록’은 감탄의 크기이며, ‘가끔’은 일상을 견디게 하는 작은 틈이다.
작가의 삶 속에 이 부사들은 비교적 밝고 단정하다. 그러나 그 밝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부사는 점점 질문이 되고, 의심이 되고, 스스로를 향한 반문이 된다.

‘또다시’에 이르면 반복의 무게가 드러난다. 같은 자리에 돌아와 있는 자신, 바뀌지 않는 일상, 익숙해진 좌절. 이 책에서 반복은 무력함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처럼 다뤄진다. 도망치지 못해 다시 서게 되는 자리, 그 자리에서 또다시 말을 고르고 문장을 쓰는 몸. 작가는 반복을 부정하지 않는다. 반복 속에서도 살아야 했던 시간을 정직하게 놓는다.


책의 중반 이후의 부사들은 훨씬 아프다. ‘무심코’는 상처의 시작이고, ‘혹시’는 불안의 언어이며, ‘당연히’는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밀어 넣었던 기억이다. 특히 ‘혹시’가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이 책은 깊어진다.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혹시 괜히 예민한 건 아닐까, 혹시 사랑받지 못한 건 아닐까. 이 ‘혹시’는 사소해 보이지만, 삶을 끊임없이 후퇴시키는 말이다. 작가는 이 부사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본다. 불안이 어떻게 성실로 가장되고, 책임감으로 오해되며, 결국 자기 검열이 되는지를 차분히 짚어낸다.

‘반드시’에 이르면 믿음에 생긴 균열이 드러난다. 열심히 살면 반드시 보답받을 거라는 말, 착하게 살면 반드시 괜찮아질 거라는 말. 작가는 그 믿음에 구멍이 났음을 고백한다. 노력과 결과가 언제나 나란히 오지 않는다는 사실, 선함이 보호막이 되지 않는 순간들. 여기서 삶은 처음으로 분명히 좌절한다. 그러나 좌절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히 기록한다. 반드시라는 믿음에 구멍이 난 자리를 희망 부스러기로 덧대어 바람을 막고 무사히 생을 지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과연 소위 작가답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잘 살아왔는지, 과연 자격이 있었는지, 과연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과연’은 마지막 질문처럼 놓인다. 이 질문은 독자에게도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어느새 나 자신의 부사를 떠올려본다. 늘 쓰던 말, 쉽게 내뱉던 말, 스스로를 몰아붙이던 말들 속에 나의 부사는 어떤 행동을 낳았을까. 그러나 책을 읽다 보니 마침내, 마지막 부사에 이르고 만다.


무심코 상처를 주고, 혹시라는 말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당연하다는 말에 갇히고, 반드시라는 믿음에 흔들리며 과연 자격이 있는지 묻던 시간들 끝에서 작가는 단단하게 말한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도망치지 않고 써왔고, 의심 속에서도 버텼으며, 끝내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다고.'마침내'는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이 ‘마침내’는 환호가 아니라 숨 고르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 부사는 더 나아가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여기까지 온 자신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말이다.

작가는 “마침내, 내 글이 책이 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삶은 명사가 아니라 부사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마침내, 이 말 하나로 이 책은 정말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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