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홍수〉가 남긴 몇 가지 불편한 사유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홍수〉는 거대한 재난 영화처럼 시작한다. 도시를 삼킨 물, 고립된 아파트,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 화면은 전형적인 재난 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끝까지 보고 나면 분명해진다. 이 영화의 중심은 재난이 아니다. 환경도 아니다. 이 작품이 끝내 도달하려는 지점은 AI에게 감정을 학습시키는 실험, 그중에서도 모성애의 재현 가능성이었다는 사실을 관객은 뒤늦게 알게 된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영화일 것이라 짐작했다. 홍수라는 재앙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비추고, 어쩌면 곧 닥칠 현실에 경각심을 주는 이야기라 기대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긴, 지구나 환경 관련 재난 영화는 너무나 많으니까.
이 영화의 서사는 예상보다 단순하다. 소행성 충돌로 인해 대홍수가 발생했고, 인류는 멸망의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설정에 비해 정부와 사회의 대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한 여성과 한 아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극한의 상황에 집중된다. 관객이 따라가게 되는 것은 지구의 멸망이나 세계의 붕괴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려는 한 개인의 선택과 감정이다.
주인공은 학습 데이터
영화 속 주인공 안나는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AI 개발 연구원이다. 그녀 만은 이 영화에서 구조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임무가 부여된 인물이다. 그녀는 홍수로 인한 재난 속에서 아이를 보호하려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이 차오르는 공간에서 아이를 안고 버티고,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의 생존보다 아이를 우선한다. 이 반복되는 장면들은 관객에게 모성애의 강도를 각인시킨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 감정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이 모든 상황이 실제 재난이 아니라, AI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기 위한 시뮬레이션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인류를 대표하는 생존자가 아니라, AI가 관찰하고 축적해야 할 감정의 원천이었다. 그의 선택과 망설임, 공포와 애착은 모두 데이터가 된다.
"그 이모션 엔진이라는 게 사람 감정, 마음 같은 게 들어가 있다는 거죠?"
안나를 구조하러 온 요원이 던지는 이 질문은 영화의 방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그 방향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AI가 학습해야 할 인간의 핵심 감정으로 선택된 것은 연대나 윤리가 아니라, 모성애다. 아이를 지키려는 본능, 자신을 희생하는 감정. 영화는 이를 가장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다움으로 제시한다. 그렇다고 감정이 완성되면, AI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왜 재난이 필요했을까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이 감정 학습 실험에 정말 대홍수가 필요했을까. 홍수의 원인은 기후 위기가 아니라 소행성 충돌이라는 짧은 언급으로 처리된다. 재난은 분석되지 않고, 책임도 묻지 않는다. 국가도, 사회도, 집단적 대응도 화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세계가 멸망하는 날이라고 하기에는, 극한의 혼란이나 붕괴의 풍경도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거대한 재난은 '국가의 문제'이기보다 특정 공간, 특정 아파트의 사건처럼 축소된다. 인류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기보다, 한 장소에 갇힌 위기로 느껴진다. 결국 대홍수는 세계의 붕괴가 핵심이 아닌, AI 실험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조건으로만 필요했던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때문에 영화는 환경 영화도, 재난 영화도 되지 못한다. 재난의 크기에 비해 세계의 반응이 지나치게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왜 이렇게 쉽게 포기되는가
영화는 또 하나의 전제를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현 인류는 더 이상 구할 수 없으며,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거의 논증되지 않는다. 인류가 왜 회복 불가능한 상태인지, 다른 선택지는 왜 배제되었는지 설명이 없다.
소행성 충돌을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현 인류를 포기하고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은, 과연 누가 내린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다. 사회적 합의도, 집단적 절망도 보이지 않는다. 인류는 설명 없이 퇴장하고, AI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결론만 남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컨트롤 타워는 관객에게 보여지지도 언급되지도 않으면서 주인공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녀의 아들은 이모션 프로젝트에 성공한 휴머노이드, 인간형 AI였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할 인간이 아니라, AI가 인간다움을 학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던 것이다.
감정은 학습될 수 있는가, 그다음은?
〈대홍수〉가 던지려 했던 질문은 분명하다. AI는 인간의 감정을 배울 수 있을까. 모성애는 재현 가능할까. 인간다움은 데이터로 이전될 수 있을까.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을 충분히 밀어붙이기보다, 실험의 성립 여부에 서사를 집중시킨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내 온전히 녹여내지 못한 인상이다. 그래서 관객의 질문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한다. AI가 감정을 배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인간은 이렇게 쉽게 대체 가능한 존재로 설정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와 닿았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순간마저 피곤해질 정도로, 의문은 꼬리를 문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설정의 영화라도, 그 안에 몰입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저런 세상이 오면 어떡하지?", "저런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살까?" 하고 상상하며 영화를 곱씹게 된다. 생각할 거리가 남는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홍수〉는 보는 내내 내용에 몰입하기보다 "왜 저러지?", "왜 이렇게 설정했지?"라는 질문이 앞서는 영화였다. 감상보다 비판의 눈이 먼저 커졌고, 그만큼 아쉬움도 크게 남았다. 이 영화가 끝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인류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그 선택의 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의 의도는 희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