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육아 고단함 날린, 며느리의 뜻밖의 선물

청춘의 발걸음 남아 있는 서울로 2박 3일 나들이

by 혜솔

서울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할 때까지, 주거지로 서울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날의 추억과 청춘의 발걸음이 남아 있는 도시, 삶의 많은 계절을 함께 건너온 곳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살고 있는 지금은 서울로 향하는 길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다. 수도권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지만 아직 철도가 연결되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적지 않은 피로를 감당할 용기가 필요하다. 서울 토박이에게도 서울 나들이는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깊어졌다는 사실이 겁나기도 한다.


서촌 한옥에서 2박 3일


▲수성계곡에서부터 윤동주 시인의 하숙터, 그리고 통인시장. ⓒ 신혜솔


그런데 지난 7일, 나는 용기를 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2박 3일의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이번 서울행은 며느리가 건넨 뜻밖의 선물이었다. 학교 교사인 며느리는 겨울방학임에도 연수와 출근 일정으로 분주했다. 그 와중에도 손주를 돌보느라 지친 내 어깨를 헤아렸는지, 서촌의 한옥에 2박 3일의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한옥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한옥집에서 지내보는 것은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첫날은 동네 골목길을 천천히 돌아다니다 들어와 쉬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나온 것이 오랜만이라 긴장했는지, 몸이 금세 피곤해졌다.


둘째 날, 경복궁역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 계곡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겨울 공기가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계곡의 물도 꽁꽁 얼어 있었다. 천천히 길을 걸어 내려오다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터 앞에서 멈췄다. 작은 안내문과 태극기가 어느 집 담벼락에 박혀 있었다. 시인의 숨결이 아직 그곳에 머무는 듯,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시 한 줄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중에서


청년 시인의 떨리는 고백이 겨울 공기 속에 머무는 듯했다. 계곡 쪽으로 올라가던 등산객 일행이 웃으며 나를 흘긋 쳐다본다. 내가 시를 읊고 있어서였을까.


중학교 시절, 이 시를 예쁘게 써서 학교 화장실 벽에 붙여 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각 반마다 시 한 편씩 준비해 화장실에 붙여 놓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소녀 시절의 내가 윤동주 하숙집 터 앞에서 다시 불려 나왔다. 젊은 날의 나는 어디쯤 놓여 있을까. 부끄럼 없이 살다가 시인이 되었을까. 그렇게 서촌에서 시작된 하루는 조금씩 깊어졌다.


▲북촌의 한옥 지붕선과 돌담을 따라 오래된 삶의 시간이 이어지는 듯하다. ⓒ 신혜솔

통인시장으로 내려오니 사람들의 온기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시장 안에서 먹거리를 사고 별도로 마련된 도시락 카페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래된 시장은 정겨움을 나누는 장소로 변모해 있었다. 서촌은 좁은 골목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한옥을 보수해 식당과 카페, 게스트하우스로 바꾼 공간이 대부분이었다.

골목마다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오후를 지나 경복궁으로 가기 위해 청와대 길로 들어섰다.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였다. 저마다 다른 바람과 목마름이 적힌 손팻말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소란을 뒤로하고 신무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섰다.

▲경복궁 가는 길, 서촌에서 청와대 길을 거쳐 경복궁으로.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신무문을 통해 궁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향원정이 보인다. ⓒ 신혜솔

향원정 앞 벤치에 앉으니 찬 바람 속에서도 햇살은 따뜻했다. 여러 나라의 언어가 공기를 흔들며 지나가고, 한복 차림의 관광객들이 나비의 날개처럼 궁궐을 스쳤다. 한때 마음속 깊이 남아 있던 고궁의 고요는 더 이상 예전 그대로가 아닌 듯했다. 세월은 모든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 소풍, 미술대회로 자주 찾았던 경복궁은 이제 또 다른 세상 속 풍경으로 서 있었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며 다시 오래된 서울 거리와 마주했다. 웅장해 보이던 세종문화회관이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세월 탓일까. 건물들의 화려함과 활기 속에서 발걸음은 다시 서촌으로 향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낮에 눈여겨보았던 골목 안 LP바로 들어섰다. 오래된 벽돌 건물 안에 낡은 앨범들이 빼곡했다.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주인장이 틀어주는 음악을 들었다.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들이 시간의 문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눈을 감자 청춘의 날들이 한 장씩 스쳐갔다. 육아의 고단함도, 나이 듦의 무게도, 삶이 요구하는 책임도 그 잠깐만큼은 멀어졌다. 서촌의 밤은 조용하고 따뜻하게 깊어갔다.



고마웠다, 소중한 나만의 여행


▲정독 도서관, 학교 건물이었던 본관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 신혜솔


이제 마지막 날이다. 안국역에서 북촌 한옥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촌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서촌이 서민적인 먹거리골목과 한옥이 오래된 모습 그대로라면, 북촌은 우아하고 정돈된 느낌이었다.

가회동 성당에 들러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정독도서관'이라는 이정표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하던 시절, 날마다 다니던 정독도서관이다. 옛 경기고등학교가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난 공간, 그곳 역시 나의 청춘이 스며 있는 장소였다.

나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향해 빠른 걸음을 걸었다. 입구가 달라 보이는 것도 세월 탓일 것이다. 북촌과 연결되며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이유일지 모른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서자 옛 생각이 밀려왔다. 많이 새로워졌지만 학교 건물이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만 모아 둔 자료실도 새로 마련되어 있었다. 여전히 좌석을 발급받아야 하는 시스템 앞에서, 좌석 때문에 숨 가쁘게 뛰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번 여정의 핵심은 결국 과거의 나, 젊은 나, 어린 나를 만나러 온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집을 나서던 그 시절의 내가 문득 그리워지는 오후였다. 도서관에서 나와 광화문 쪽으로 걷다 처음 보는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발길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열린 송현 녹지광장.


▲열린 송현 녹지광장, 서로 다른 재료와 시간의 결을 지닌 구조물이 서로에게 질문을 하는 듯하다. ⓒ 신혜솔


서로 다른 재료와 시간의 결을 지닌 구조물들이 빈 땅 위에 서 있었다. '짓는 행위보다 기르는 마음이 먼저'라는 문장 앞에서 발길이 오래 머물렀다. 과거 미군 숙소 부지였던 이 공간은,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함께 품고 정리되는 느낌을 주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손주가 기다리는 집으로. '황혼 육아'라는 이름의 노동 뒤에 찾아온 짧은 외출이었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시인의 자취가 머무는 골목 언덕에서, 오래된 음악이 흐르는 밤으로, 그리고 청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도서관까지. 며느리의 다정한 배려 속에서 출발한 여정은 과거를 지나 다시 지금의 '나'에게로 돌아왔다. 먼 길을 다녀온 듯 고단하지만 소중한 나만의 여행,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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