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인 작가의『노빠꾸 상여자의 벨기에 생존기』를 읽고
요즘 나는 브런치 작가들이 출간한 책을 자주 읽는다. 오래도록 응원하며 읽어온 글들이 책으로 묶여 나올 때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가족의 일처럼 반갑고, 함께 기뻐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조용히 읽는 독자에 가깝다. 댓글이나 답글로 마음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아, 소통하는 작가도 많지는 않다. 다만 묵묵히 읽고 응원하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을 소개해준 류귀복 작가의 글은 늘 작은 용기를 건넨다. 그의 글에는 특정한 누군가를 띄우기보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따뜻한 응원의 시선이 담겨 있다. ‘언젠가는 당신의 글도 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같고, ‘지금 쓰고 있는 이 시간이 이미 충분히 의미 있다’는 메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 마음이 아름다워, 나는 매번 조용히 감동을 받아왔다.
『노빠꾸 상여자의 벨기에 생존기』는 제목의 '노빠꾸'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물러섬이 없는 직진과 '벨기에'라는 유럽의 조그만 나라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책을 펼치자 작가는 말한다.
해외 경험 한 번 없던 한국의 장녀가 벨기에인 드러머를 만나 결혼하고, 낯선 나라에서 17년째 살아온 이야기라고. 이 책이 들려주려는 것은 단순한 국제결혼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서울의 대학로에서 시작된 사랑은 곧바로 가족의 벽, 특히 '조선시대 멘털'로 묘사되는 아버지의 권위와 맞부딪히며 삶의 방향을 바꾼다.
이 책의 1부는 사랑도, 낭만도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라는 아주 현실적인 다짐에서 출발한다. 벨기에로 건너온 작가는 국제결혼한 아내로 불리는 대신, 그 사회 안에서 기능하는 한 개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언어를 배우고, 공부하고, 노동하고,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자주 좌절을 동반하지만 결코 물러섬이 없다.
자기만의 것을 찾아 일해보려고 진학한 대학원은 인문계 출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전공 구조 앞에서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포기는 좌절로 남지 않는다. 대신 그는 네덜란드어를 확실히 익히는 데 집중한다. 행정 언어, 시험 용어, 일상과 노동의 언어를 몸에 새긴다. 학위는 내려놓았지만, 언어를 손에 쥔다. 이 선택은 이후 공공 영역으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
이 시기의 ‘노빠꾸’는 무작정 밀어붙이는 성격이 아니라, 자기 삶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가에 대한 신뢰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과정을 결코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외로움을 과장하지 않고, 고단함을 영웅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늘 질문을 한다.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점에서, 1부는 한 사람의 시민 성장기처럼 읽힌다.
책의 중반을 지나며 분명해지는 것은, 작가가 가진 가장 큰 무기가 ‘깡’이 아니라 자기애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기 중심성이나 오만함이 아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쉽게 깎아내리지도 않는 힘이다. 무너질 때조차 '이건 끝이 아니라 통과'라고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근력.
작가가 위기를 기회로 잡는 지혜로운 사람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불합리한 제도와의 충돌로 이야기는 채워진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도 국적 문제와 행정 착오로 인해 자리를 위협받는 장면에서 특히 인상 깊었다. 여기서 작가는 감정에 기대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절차를 밟고, 기록을 남기고, 끝까지 문제를 짚어낸다. 국적을 바꾸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그 선택을 하지 않는다. 편의보다 원칙을 택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다른 독자들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의 중심은 성공이 아니라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작가에게 힘듦은 비극이 아니라 도전의 질감으로 남는 것 같다. 울음은 있지만 자기 연민으로 굳지 않고, 분노는 있지만 증오로 번지지 않았다. 매번 다음 선택으로 이동하는 계기로 삼는다. 이 태도가 있었기에 작가는 외국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감 있는 개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 보곤 했다. 나라면 이럴 수 있었을까.
2부로 넘어가면 책의 중심은 가족, 아이들에게로 옮겨간다. 그러나 이 서사는 ‘희생하는 엄마’의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 작가는 여전히 자신이 배운 방식대로 문제를 다룬다. 아이를 대신 싸워주기보다, 아이가 살아갈 세계를 넓혀주는 쪽을 택한다.
특히 큰아들이 인종차별의 언어를 들고 돌아온 장면은 이 책의 정점이다. 작가는 분노로 맞서지 않았다. 대신 한국을 설명하기로 한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한국의 전래동화를 읽어주고 네덜란드어로 설명을 해주며 아이들에게 세계관을 넓혀준다. 한국의 이름과 문화, 음식과 이야기로 아이들의 인식을 확장한다. 차별을 개인의 악의로 축소하지 않고, 모름에서 비롯된 언어로 정확히 짚어낸 뒤, 아이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한국은 강한 나라, 멋진 나라라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알려준다.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준 엄마, 이 장면에서 감동적인 것은 통쾌한 반격이 아니라 지혜로운 물러섬이다. 작가는 차별을 이기려 하지 않았고 대신 차별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아이들은 ‘다른 피부색’을 넘어서 ‘같은 감정’을 먼저 배우고, 한국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가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작가가 엄마로서, 시민으로서, 한국의 조선시대멘털 아버지의 장녀로서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깊이 느꼈다.
이어지는 교육에 대한 작가의 태도 역시 일관된다. 아이를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곧 세계를 건너가야 할 시민으로 대한다. 대신해주지 않고, 기다리고, 실패할 시간을 허락한다. 남의 나라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온실 속에 두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세계로 내보내는 준비라는 점을 작가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에필로그의 제목은 단순하면서도 안정감 있어 좋다.「잘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책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든다. 벨기에에서 17년을 살았지만, 작가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벨기에에서도 늘 어느 ‘사이’에 서 있는 사람. 그러나 그 사이는 더 이상 불안한 경계가 아니다. 그냥, 그 자체로 정체성이 된다. 그래서 잘 살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게 이런 삶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아마 중간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작가는 나에게 깊은 감동과 대리 만족을 주었다. 모두가 할 수 없는 삶을, 작가는 끝까지 선택했기 때문이다.
『노빠꾸 상여자의 벨기에 생존기』는 성공담이 아니다. 이 책은 국제결혼한 사람도, 이민자도, 엄마도 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으로 서고자 했던 한 사람의 기록이다. ‘노빠꾸’란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자기 삶을 끝까지 설득해 온 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태도가 이 책을 오래 살아 있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