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고뇌와 다정한 시선을 들여다보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을 다녀와서...

by 혜솔

'2025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전시장 입구, 시드니 스미스의 포스터가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맑고 투명한 햇살이 스며드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한 아이의 뒷모습. 그 고요한 몰입의 순간은 그림책이라는 작은 우주가 열리는 통로와 같다. 시각적 화려함보다는 정서적 깊이를 우선하는 그의 필치는 이번 전시가 지향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21일, 손자 로리의 손을 잡고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찾았다. 리모델링 공사로 다소 어수선한 복도조차 그림책의 매혹에 빠진 손자의 설렘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지난 60여 년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진행된 이 전시는 매년 전 세계에서 주목할 만한 그림책과 일러스트 작품들을 선정하며 신인에게는 데뷔의 문이, 기성 작가에게는 치열한 실험의 장이 되어왔다.


속도를 멈추고 발견한 풍경들


전시 초입인 '볼로냐를 사로잡다' 섹션은 14인의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로리는 리사 로프레도의 <한 밤중 코끼리>, 크리스티나 피에로판의 <표범은 아니지만>을 눈 여겨 보는 듯 했다. 로렌조 산지오의 <서둘러 서둘러> 앞에서는 환하게 웃으며 멈춰 섰다. 2025년 프랑스에서 그림책으로 출간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늘 바쁘게 달리는 토끼다. 수채화와 과슈의 부드러운 질감 속에 담긴 토끼의 모습은, 서두르느라 주변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사는 우리의 자화상을 겹쳐 보게 한다.


"토끼는 왜 이렇게 빨리 뛰어 가? 급한 데 가는 거야 할머니?"


로리의 천진한 물음이 문득 발끝을 잡는다. 아이는 그림 속 구석에 숨은 고슴도치와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찾아내며 이미 그 세계를 충분히 탐험하고 있는데, 나는 그저 토끼의 속도만을 계산하고 있었다. 작가들의 힘은 이처럼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같은 장면을 오래 바라보게 하고, 마침내 서로의 시선을 섞이게 하는 데 있다.


걸음은 천천히 다음 섹션인 일상의 특별함을 길어 올린 자리로 이어진다. 우루과이 작가 앙헬리나 몬테로가 묘사한 <도시의 단편>은 몬테비데오의 풍경을 따스함과 향수가 깃든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그에게 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 찰나의 시선,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가로수, 걷는 속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상점의 간판들이 켜켜이 쌓인 살아 있는 유기체다. 작가는 세상을 관찰하는 법을 통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시적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증명해 보인다.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현실의 경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림책의 역사 속에서 데이비드 위즈너나 앤서니 브라운 같은 거장들이 그러했듯,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현실과 초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특히 한국 작가 안경미의 <가면의 밤>은 한국 전통 신화와 가면 설화에서 길어 올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화면 중앙, 아이는 모범생의 얼굴과 사나운 표정의 가면을 번갈아 써보며 진짜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가면이 안 벗겨지면 어떡해?"


IE003585545_STD.jpg ▲여명-마크 마틴 ⓒ 신혜솔


기묘한 가면들을 들여다보는 로리의 혼잣말은 정체성과 성장이라는 주제를 가장 아이 다운 언어로 관통하고 있었다. 어른에게 환상이 해석하고 분석해야 할 대상이라면, 아이에게 환상은 언제나 살아있는 질문이자 모험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닐까. <가면의 밤>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2024년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어린이 독서 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자연을 다루는 섹션에서의 시선은 경이로운 생명에 머물게 된다. 호주 작가 마크 마틴의 <여명>에서는 해 뜨는 순간의 생명력이 아름답다. 풀잎을 기어가는 무당벌레의 미세한 움직임과 거미줄에 맺혀있는 빗방울, 소금쟁이, 날아가는 새들의 움직임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는 관찰자인지 혹은 그 안에서 함께 숨 쉬며 책임을 공유하는 일부인지 곰곰이 곱씹어 보게 된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질문들


이 섹션에서 작가들은 인간의 삶을 둘러싼 크고 중요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아동 인권과 공동체 의식, 차별과 장애, 관계의 균열과 회복, 나아가 전쟁과 홀로코스트처럼 무겁고 복잡한 역사까지. 다루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아이의 눈높이를 놓치지 않는다. 어린이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작가들은 질문을 낮은 곳에 내려놓는다.


스페인 출신의 그림책 작가 안나 폰트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할까>라는 제목을 보고 멈춰 섰다. 이 작품은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구 하나를 갈기 위해서는, 혹은 어떤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과연 몇 명의 사람이 필요할까.


이 물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서로의 손에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어 만난 작품은 칠레 출신의 두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아 예수스 구아르다'와 '카리나 메텔리에르'가 함께 작업한 <아이들에게도 권리가 있다>이다. 이 작품은 칠레 산티아고의 한 문화센터가 주관한 아동 인권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 50주년을 계기로 '아동 역시 권리의 주체'라는 사실을 다시 묻기 위해 기획 되었다.


작품은 아픈 역사를 품고 있지만, 화면은 한없이 밝고 선명하다. 분홍빛 잠수함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 소리를 내지르는 갈매기 같은 친근한 캐릭터들은 역설적으로 묻는다. 과연 아이들은 권리의 주체로 존중 받고 있는가. 무거운 정치적 서사를 아이들의 언어로 치환해낸 솜씨가 놀랍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의 권리가 어떤 미래로 이어져야 하는지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웅변한다.


IE003585544_STD.jpg ▲아이들에게도 권리가 있다마리아 예수스 구라르다& 카리나 레텔리에르 ⓒ 신혜솔


이 섹션에서의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영국 작가 벤자민 필립스의 <다리 긴 남자>다. 유난히 큰 키 때문에 소외 당하던 남자가 거센 홍수 속에서 자신의 긴 다리를 이용해 사람들을 구하는 '다리'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전시장을 나왔을때 로리에게 물어 보았다. "어떤 그림이 제일 기억에 남아?" 아이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다리 긴 남자'였다. 이유를 묻자 아이는 조목조목 제 생각을 꺼내 놓는다.


"그렇게 키가 크고 다리가 길면 얼마나 불편해. 앉을 때도, 목욕할 때도 힘들고 남들이랑 이야기도 잘 못 하잖아. 거리를 걸을 때 다른 사람들도 불편할 것 같아."


아이의 눈에 비친 다름은 우선 '불편함'이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가 겪을 일상의 곤란함을 먼저 헤아린 것이다. 나는 아이의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


"맞아, 평소엔 참 불편했겠지. 하지만 홍수가 났을 때 그 사람은 다리가 길고 키가 커서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도와줄 수 있었잖아.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지?"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혼자 건널 수 없으며, 서로의 다름을 의지처 삼아 함께 나아가야 할 곳임을 작가들은 낮은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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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긴 남자-벤자민 필립스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엘리사 카라레토 알베스


여정의 끝, 마음속에 남은 조각들


마지막 섹션에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외로움 같은 원초적인 감정부터 그리움과 연민, 호기심, 우울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다양한 결을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작가들이 펼쳐 놓은 감정의 파편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감정의 조각'에서 만난 브라질 작가 엘리사 카라레토 알베스의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는 전시장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마침표와 같다. 볼펜과 색연필로 절제되게 그려낸 이모에 대한 아련한 기억은 설명 대신 속삭임과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망각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화면 속에서 어린 시절의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부드러운 색감으로 스며든다. 감정은 선명한 문장으로 정의되지 않고, 때로 조각난 이미지로 남아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수많은 그림책의 원화들을 둘러보았지만 지면에 다 남길 수 없는 게 아쉽다. 이미 그림책으로 출간된 책들과 앞으로 출간될 그림책이 우리 아이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기대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서평을 써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화려한 그림체와 자극적인 이야기 뒤에 숨겨진 작가들의 치열한 고뇌와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이토록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었을까. 오디오 도슨트의 안내를 따라간 이번 여정은 앞으로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더 깊은 숨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은 생애 첫 미술관이며, 어른에게 그림책은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는 거울이다. 로리의 작은 손을 잡고 미술관 밖으로 나서는 길, 내 안에 남은 감정의 결을 잠시 더듬어 본다. 봄이 오는 공기 속에서 그림책 속 햇살이 따스하게 남아 있었다.


2025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25년 12월 27일 ~ 2026년 3월 2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IE003585540_STD.jpg ▲포스터시드니 스미드 ⓒ 한가람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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