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독립운동 기념관에 다녀오다
3·1절을 앞둔 2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다섯 살 손자의 손을 잡고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독립운동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날 처음 방문했다.
제암리는 1919년 화성 지역 3.1 만세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현장이다. 1919년 4월, 일본군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둔 뒤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다수의 주민이 희생됐다. 이 사건은 한동안 지역사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후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면서 화성 지역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재정리됐다.
제암리 사건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었다. 송산·향남·팔탄 등 화성 전역에서 이어진 만세운동과 그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지역별 저항과 진압 과정이 자료로 축적되면서, 화성의 독립운동사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외부에 알린 외국인 선교사들의 기록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제암리 사건 현장을 촬영하고 보고서를 남겨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이러한 기록은 사건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조사와 기록의 축적을 바탕으로 화성의 독립운동사는 전시 공간으로 정리됐다.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2001년 개관)을 기반으로 전시 범위와 규모를 확장해 2024년 4월, 화성시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기념관의 연혁을 보면 지역의 기억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알 수 있다. 1919년 사건 이후 1959년 기념탑 건립, 1982년 유해 발굴과 사적 지정, 1993년 교육관 건립, 2001년 기념관 개관을 거쳐 현재의 독립운동기념관으로 확장됐다.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은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다. 양옆으로 콘크리트 벽이 길게 이어지고, 방향을 한 번 꺾어 다시 낮아진다. 전시장 입구에 이르면 돌로 쌓은 벽 위로 태극기가 걸려 있다. 흰 바탕과 태극 문양, 네 개의 괘가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펼쳐져 있다. 걸음을 잠시 멈추어 태극기를 올려다 볼 수 밖에 없는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손자 로리와 함께 상설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전시장 한쪽 벽에는 화성 지역 독립운동 참여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까만 바탕에 하얀 이름이 별처럼 떠 있었다. 크기가 다른 글자들,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이름들 앞에서 문득 생각했다.
이 많은 이름들이 모두 화성의 역사라는 사실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교과서에서 배운 독립운동은 대부분 다른 지역의 이야기였고, 내가 사는 도시의 이름은 그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이 고장에 살면서도, 이 이름들 앞에 서 본 적은 없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지역의 역사가 추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의 선택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내가 전시장 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독립선언문 전시 구간이었다. 노란빛을 띤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선언문은 유리 안에 보존돼 있었고, 관람객이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조성돼 있었지만 글씨를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래된 문서의 낡고 낯선 글씨체가 눈을 버겁게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 선언문을 달달 외우던 기억이 났다.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구간, 첫 소절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이어 또 다른 벽면엔 화성 지역 만세운동이 전개된 장소들이 지도 형태로 정리돼 있었다. 지역별 사건의 흐름을 화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로리는 화면을 눌러 여러 지역을 살펴봤고, 잠시 그 앞에 머물렀다. 불이 켜지면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치니 신기했던가 보다. 송산지역, 향남, 팔탄지역의 작은 마을들이 만세운동의 집결지로 표시되어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 구간을 만세길로 지정해 별도로 탐방 할 수 있게 조성 해 놓았다는 정보도 보았다.
영상관에서 4분정도 되는 영상을 보았다. 내레이션도 자막도 없었다. 어두운 화면 위로 추상적인 이미지와 음악만이 흘렀다. 닫힌 공간과 번지는 불빛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어둠과 비바람, 총구, 보기에도 으스스한 느낌을 받는 이 영상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나는 안다. 로리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영상이 끝난 뒤 아이가 한 번 더 보자고 했고, 같은 영상을 다시 보았다. 로리는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말 한마디 않고 영상이 끝날 때까지 집중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영상관에는 로리와 나 둘뿐이었다.
영상이 끝난 뒤, 로리에게 제암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 옛날 일본의 지배로 인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힘들게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고. 그때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일본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나가라"고 외쳤고,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고 이야기 했다. 작년에 함께 다녀온 일본 여행 이야기도 덧붙였다. 옛날의 잘못은 분명 일본이 했지만 지금은 서로 오가며 살아가는 이웃이 되었다고 말하자, 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이 전시장에서는 장터와 산이 재현돼 있었다. 로리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쳐보았고, 산 모형 위에 올라 다시 한 번 팔을 들어 올렸다. 놀이처럼 보였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전시를 마친 뒤 기념관 위에 조성된 공원을 걸었다. '만세길'이라 적힌 산책로였다. 하늘이 넓게 열려 있었고, 바람이 그대로 얼굴에 닿았다. 이어 제암리교회 앞 3·1순국유적지 공원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한쪽에는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는 스코필드 선교사의 동상이 있었다. 그의 기록과 증언이 남았기에, 이곳의 시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3·1절을 앞두고 찾은 공간은 조용했다. 그러나 조용함 속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독립운동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았고, 기억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이번 방문은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 옆에 서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다시 배우는 자리였다.
우리는 종종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딘가를 찾지만, 그 과정에서 어른이 먼저 시선을 바꾸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이의 눈높이 덕분에, 나 역시 익숙했던 도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3·1절에 태극기를 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현장을 직접 찾아보고, 지역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 역시 필요하다. 화성에 사는 시민으로서, 이곳의 역사는 내가 먼저 알아야 할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