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도서관

인자, 경기 히든 작가가 건네는 삶의 증언

by 혜솔

『삶은 도서관』은 제목 그대로의 온도를 지닌 책이다. 삶을 끓여낸 자리에 남는 깊은 맛처럼, 이 책에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축적된 사람의 시간이 배어 있다. 이 책은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좋은 태도’에 대한 기록이다.

인자 작가는 경기 히든 작가로 선정되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이력보다 먼저 기억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태도다. 조용히 말하고, 끝까지 듣는 태도.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가능한 한 늦게 포기하려는 자세, 그 태도가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보이게 만든다.


이 책에서 도서관은 결코 정적인 장소가 아니다. 정돈된 서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이다. 읽던 책의 제목을 잃어버린 노인, 유모차를 끌고 햇빛 브런치를 즐기러 오는 할머니들, 치매를 앓으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들어오는 자매 같은 어르신.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사서의 손과 목소리. 이곳은 책이 머무는 공간이기 이전에, 사람이 드나드는 생의 현장이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단어를 조합시켰는지 눈에 선하다.
노인이 남긴 이 한 문장을 단서로 작가는 사라진 책을 찾기 시작한다. 데이터베이스는 번번이 실패하고 시스템은 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인의 말을 다시 듣고 기억을 더듬으며 마침내 한 권의 책에 도달하는 과정은, 사건 해결이라기보다 존엄의 복원에 가깝다. 도서관을 ‘흥신소’에 비유하면서도 따뜻하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탐정은 단서를 쫓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책은 도서관의 냉정함 또한 숨기지 않는다. 연체와 예약 취소, 폐기 규정, 자동 발송 문자. 규정은 분명 존재하고 설명은 단정해야 한다. 규정을 말할 때 목소리가 AI 상담사처럼 낮아진다는 고백에는 웃음과 함께 감정 노동의 피로가 스친다. 그러나 작가는 규정을 악으로 만들지 않는다.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규정 앞에서 마음이 멈추는 순간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윤리적 긴장 속에서 도서관은 오히려 인간적인 공간으로 드러난다.


“나는 대출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이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글이다. 책을 빌려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서사를 잠시 맡아두는 일이라는 인식. 그래서 대출 데스크는 행정의 창구를 넘어, 삶이 오가는 접점으로 확장된다. 반납 기한이 적힌 종이 한 장에도 사정이 깃들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 책에 담겨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마음이 깊게 빠져드는 지점은 개인의 기억으로 확장될 때다. ‘1.5톤의 짜장면’은 그냥 음식에 대한 추억담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욕망, 노동의 무게, 아버지의 트럭과 도시 노동자의 하루가 한 그릇에 담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슬픔의 이유. 이 기억은 작가가 왜 사람의 서사를 귀하게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근원이 된다. 독자 역시 자신의 첫 짜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 이 책은 개인의 기억을 호출하는 공감의 장소가 되지 않았을까?


삼겹살을 구우며가 아닌, '삶겹살을 구우며'는 시가 압도적이었다. 역시 인자 작가는 시인이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가족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던 어느 하루를 시인은 '삶겹살'을 굽는다. 삼겹살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사물에서 출발하지만, 시선은 고기에서 삶의 무게로 옮겨간다.

마트 정육 코너의 망설임, 300그램을 더 얹는 손의 떨림, 숯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시간은 모두 오늘을 버텨낸 사람들의 사소한 의식처럼 읽힌다. 마음의 결은 여기다. 한 점의 고기로 서로를 다독이는 방식, 응원은 함성이 아닌 불판 위에서 바삭하고 구워지는 소리로 전해지는 감각.

화자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오늘도 하루,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응원하는 살들이, 아니 삶들이 / 한 점 한 점 오른다”라는 시구가 더욱 깊게 남는다. 오늘을 무사히 구워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내일도 다시 불 앞에 설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한 점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후반부에서 『삶은 도서관』은 생의 한가운데로 돌아간다. 시를 배우던 수업 시간, 멘토와의 만남, 결혼과 출산으로 뛰어든 생의 한가운데서 잊고 있었던 글쓰기와 재 도전. 제 자리를 찾은 작가의 지금은 도서관이다.

오래된 책이 다시 대출되는 순간. 누군가 반납한 책이 자신의 청춘과 겹쳐질 때, 도서관은 시간의 교차로가 된다. 낡은 책에 남은 손때는 한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여러 생이 협업한 결과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도서관에서 쓰고 있다.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것이 책을 읽고 쓰는 지금은 나의 서재보다 편안하다.

책을 덮고 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일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대출 목록 한 장이 잠시 맡겨지는 삶처럼 느껴지고, 반납 기한을 넘긴 책에도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 같아진다.

책을 읽고 보니 도서관이 고요한 이유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인자 작가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온 것 이리라.
『삶은 도서관』은 그 애씀에 대한, 조용하고 깊은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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