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이야?

뮤지컬로 하루를 시작

by 혜솔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누가 알아주나
오~ 오오 오~
감.동.스러~워!
우리가~ 우리가~ 해결할게~ 와! 와!


이게 무슨 노래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떠올려도 내가 아는 곡은 아닌 것 같았다.


“로리야, 그 노래 누가 가르쳐 줬어?”
“음… 로리가 만든 노래야, 할머니. 왜? 감동적이야?”


요즘 로리의 입에서는, 한동안 들리지 않던 단어들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단어들은 곧장 문장이 되고, 문장은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로리는 그 이야기를 ‘말’로 하지 않고 ‘노래’로 한다. 누구도 모르는, 자기만의 곡.

어떤 날은 듣다 보면 버터처럼 느끼하게 달라붙고, 어떤 날은 이상하게 낯설어져 몸이 먼저 불편해진다. 아이답지 않게 성숙한 결이 스칠 때가 있어서다. 대체 어디서 영향을 받은 걸까. 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선명한 출처가 잡히지 않는다.

우리 집은 미디어 노출이 많은 편이 아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TV는 틀지 않았다. 화면을 천으로 덮어둔 채, 습관처럼 멀리했다. 그건 ‘비문명’을 택했다기보다, 너무 이른 자극이 아이의 욕구를 대신 채우는 쪽으로 흐를까 조심했던 선택이었다. 식당에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은 거의 다 아이에게 미디어를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나 로리는 식당에서 맛있게 밥 먹는데만 열중한다. 로리에게 그건 모르는 세상이었던 거다. 대신 들려준 건 클래식과 동요였다. 클래식 음반이 수백 장이라, 부지런히 틀어주겠다고 마음먹은 날도 많았다. 어린이집도 세 살이 될 때까지는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에야 처음 다니기 시작했고, 다음 주면 졸업이다. 이제 곧 유치원에 간다.


그런데 로리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누군가는, “할머니가 트로트를 즐겨 들으시나 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로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내 취향이 그쪽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로리의 노래는 때때로 ‘구성진’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게 조금 신기하고, 조금 당황스럽다.

로리는 하루에도 여러 사람이 된다.

어떤 때는 감동적으로 구슬프게, 어떤 때는 록커처럼 허스키하게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또 어떤 때는 무용하듯 고요하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며 성가를 부르기도 한다. 에너지가 차오르는 날에는 춤으로 집 안의 공기를 뒤집어 놓고, 배꼽이 떨어질 만큼 모두를 웃게 만든다.

정작 동요는 잘 부르지 않는다. 두 살 무렵까지만 해도 동요를 얼마나 예쁘게 불렀던가. 그래서 더더욱 “이건 대체 뭐지?” 싶은 마음이 든다.


생각해 보면, 집 안에서만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밖으로 나가면 스크린 광고가 쏟아지고, 병원 대기실에도 아이들을 붙잡아두는 캐릭터 화면이 있다. 로리는 눈도 귀도 있고, 말귀도 빠르고, 분위기와 억양을 금세 가져오는 아이다. 그러니 ‘우리 집은 아니야’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너무 어릴 때부터 화면이 모든 욕구의 해답이 되는 습관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정도의 자제와 균형은 지켜왔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제는—이 아이의 세계가 조금 더 넓어질 때가 된 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아직도 약간 낯설 뿐.


하루가 뮤지컬로 시작해 뮤지컬로 끝나는 느낌이다. 신기하고, 웃기고, 가끔은 마음이 서늘하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한 가지.
아무리 노래가 넘쳐도, 책은 꼭 열 권 이상 읽어야 하루가 마무리된다는 것. 그 고집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혹시—그 많은 책들이, 로리에게 ‘노래를 만드는 힘’까지도 건네준 걸까.
나는 오늘도 그 가능성 쪽에 마음을 조금 더 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