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을 해야 해~
어린이집에서 하원 후, 로리를 태우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백미러에 비친 아이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할머니, 오늘 무슨 책 볼 거예요?" 하고 재잘거리기 바쁜 아이인데, 오늘은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앞 도로에서 신호대기에 걸렸다. 어린이 보호구역이었고, 속도계는 시속 30km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사이, 문득 지난주 일이 떠올랐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로리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던 그 오후.
"할머니, 왜 이 노래 왜 배워야 해요?"
"응, 우리나라 노래거든. 애국가라고 해."
"무슨 뜻이에요? 동해 물이 마른다는 게?"
아이의 질문에 나는 좀 망설였다. 영원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다가 "아주아주 오래오래라는 뜻이야"라고 얼버무렸다. 아이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따라 부르며 배우더니 이제 제법 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차를 타고 달릴 때면 애국가를 부르곤 한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입에 붙은 멜로디였다. 요즘 로리에게 가르쳐주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흥얼거리던 노래. 그런데 "마르고 닳도록~" 채 부르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단호한 화살이 날아왔다.
"할머니! 노래 부르지 마요. 재미없어~"
순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른의 체면이 먼저 반응했다. 며칠 밤낮으로 가르쳐준 노래를 재미없다니. 게다가 하필 애국가를.
"이 노래가 어때서? 로리도 잘 부르는 애국가잖아. 재미로 부르는 게 아니라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거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높아졌다. 백미러로 아이의 표정을 훔쳐봤다. 로리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말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나는 슬쩍 라디오 버튼에 손을 뻗었다. 음악 방송 채널로 돌리려던 찰나, 예상치 못한 훈계가 뒷좌석에서 날아왔다.
"할머니! 집중을 해야 해! 집중을~"
로리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뭔가 진지했다. 나는 손을 멈추고 백미러로 아이를 봤다. 다섯 살짜리가 하는 말이 맞나 싶었다. 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운전할 때는 노래 부르지 말고 집중해야 되잖아. 여기 어린이 보호 구역이에요. 30km 알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애국가가 재미없다는 건 아이의 솔직한 심정이었구나. 문제는 노래의 내용이 아니라, 운전 중 집중력이었던 거다. 아이는 나를 혼내려던 게 아니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신호를 받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에 힘이 들어갔다. 속도계를 내려다봤다. 28km. 정확히 규정 속도 이하였다. 그런데도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할머니, 여기 봐요!"
로리가 창밖을 가리켰다. 도로 위에 크게 그려진 숫자 '30'.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그 숫자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표정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법규를 몸으로 익혀온 사람처럼.
"알아, 할머니가 잘 지키고 있지?"
"네, 그럼 됐어요~"
아이는 만족한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가슴 한 편이 뜨끈해졌다. 국가라는 거대 담론보다 먼저, 아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규칙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나는 핸들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는 느낌이다. 아이에게 세상을 가르친다고 믿었던 오만함이 그 작은 손끝에서 부끄럽게 녹아내렸다.
'속도 위반을 한 것도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리는 법을 어겼느냐 안 어겼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안전하게 운전하길 바라는 거였다. 그 마음이 저렇게 진지한 잔소리로 나온 것이다.
"할머니, 저기 저 차가 너무 빨리 가는데?"
옆 차선의 SUV 한 대가 우리를 추월해 갔다. 명백히 과속이었다.
"그러게. 위험하지?"
"응. 할머니는 안 그러지?"
"그래, 할머니는 절대 과속 안 해. 걱정 마."
뒷좌석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이제 다섯 살이 된 교통 감독관의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그건 아이에게 하는 약속이자,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요즘 로리는 차에 탈 때마다 이런 식이었다.
"할머니, 빨간불이에요!"
"여기 50km 길인데 맞게 가고 있어요?"
"깜빡이 켜야죠!"
처음엔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아이가 교통안전 교육을 잘 받았나보다 정도로. 그런데 오늘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배운 걸 따라하는 게 아니었다. 로리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거다. 할머니가, 그리고 길 위의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기를 바라는 거였다. 신호를 두 번 더 지나고, 마침내 도서관 주차장에 들어섰다. 시동을 끄자마자 로리가 안전벨트를 풀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오늘 운전 아주 잘했어요! 칭찬 스티커 줄게요."
아이는 가방에서 반짝이는 별 모양 스티커를 꺼내 내 손등에 척 붙여줬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착한 일 하면 붙여주는 그 스티커. 운전 경력 30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칭찬 스티커였다.
"고마워, 로리야."
목이 메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아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서 배우기 시작한 건. 일상 속 작은 배려가 소중하다는 것. 법규를 지키는 건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 로리가 도서관 입구를 향해 뛰어 갔다. 아이의 뒷모습이 어느새 훌쩍 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