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에 십자가?

옥스퍼드

by 혜솔

화형의 자리에서


길바닥에

낯선 돌 십자가 하나 박혀있어
가던 길 멈추어 섰다


누군가는 밟고 가고
더러는

못 보고 지나는데


발리올 벽에서 사연을 본다

오래전 이 자리에서

종교인 세 사람, 불을 맞았다는


돌 아래로 스며든

시간이 보인다


불에 닿았던 이름들
끝내 굽히지 못한 마음
몸은 타고난 뒤에도
남은 것이 있었나


기도는 길지 않아도 괜찮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짧고 가느다란 한숨 위로
화살 하나 날려본다


불을 건넌 이름들이여,

평안하기를


옥스퍼드는 런던에서의 번잡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에 좋았다.

대학의 도시답게 젊고 지적이며 고요한 곳임을 거리의 분위기로도 알 수 있었다. 38개의 칼리지와 6개의 사설학당으로 구성된 독립된 학교의 연합이 옥스퍼드를 대학도시로 불리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옥스퍼드 대학교가 따로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옥스퍼드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17년 전이니 그럴만했지 싶다. 지금은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해지다 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들이 그때만 해도 조금은 느렸다. 그래서 거리가 차분하고 조용했는지도 모른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옥스퍼드 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 앞에 빼곡하게 세워진 자전거들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자전거가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많고,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자전거로 돌아보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걷는 것이 더 좋았다. 역에서 시내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걷다 보니 사이언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리와 칼리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가족 단위 방문객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도 많이 보였다. 그렇다고 도시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카팍스 사거리에서 생 알데이츠 거리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옥스퍼드를 '꿈꾸는 첨탑들'이라 칭한 시인이 누구였더라? 생각하면서 크라이스트 처치로 갔다. 옥스퍼드를 찾는 사람들이 꼭 한 번 들르게 되는 곳이지만, 내가 갔을 때의 크라이스트 처치는 조용했다. 실제 칼리지이자 성당인, 장소의 고요가 먼저 느껴졌다. 성당 안에 들어가 잠시 머물렀다. 화살기도를 했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수학을 가르치던 곳이자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깊이 연결된 장소다. 이 작품은 1862년 여름, 도지슨(루이스 캐럴)이 앨리스 리델 자매와 함께 보트놀이를 하며 들려준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크라이스트 처치의 분위기는 동화의 환상성과는 사뭇 달라, 그 간극이 오히려 작품을 더 흥미롭게 쓸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호숫가에 한참 앉아 있었다. 흐린 날씨와 호수는 마음을 춥게 했다. 크라이스트 처치 정원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브로드 스트리트 쪽으로 걷는 동안, 톰 타워와 오래된 석조 건물들 사이로 셸도니언 극장과 도서관 건물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 풍경 앞에서야 누군가 옥스퍼드를 ‘꿈꾸는 첨탑들’의 도시라 불렀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매슈 아널드는 〈Thyrsis〉에서 옥스퍼드를 “그녀의 꿈꾸는 첨탑들을 가진 달콤한 도시”라고 적었다. 그 문장은 첨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래된 사유와 침묵이 도시 위에 내려앉아 있는 상태까지 함께 불러낸다. 그래서 옥스퍼드의 첨탑들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기 전에, 시간이 천천히 쌓여 형체를 얻은 한 편의 문장처럼 느껴졌다.


브로드 스트리트로 들어섰다. 한적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길바닥의 돌 십자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그 위를 무심히 지나갔고, 발리올 칼리지 부근의 그 표식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길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발리올 칼리지 벽면에 그 의미가 적혀 있었다. 그곳은 1555년과 1556년 종교적 신념 때문에 휴 래티머와 니컬러스 리들리, 토머스 크랜머가 화형을 당한 자리였다. 조금 전 지나온 순교자 기념탑과 이어지는 역사였다.

옥스퍼드를 오래된 대학 도시, 학문의 도시라고 부르는 말만으로는 다 닿지 않는 시간이 그 길바닥에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였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내게 와닿은 것은 사건 자체보다도, 그 자리가 도로 한복판에 아주 낮게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역사는 늘 박물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역사는 이렇게 일상의 길 위에 남아, 누군가는 모르고 지나가고 누군가는 멈춰 서서 읽게 한다. 그 십자가를 본 뒤로 옥스퍼드는 조금 더 무거운 도시가 되었다.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들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곳, 학문과 전통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신념과 권력, 종교와 폭력이 충돌했던 자리. 그래서 이 도시의 오래됨은 건물의 연륜보다, 그런 역사까지 지우지 않고 품고 있다는 데서 더 깊게 다가왔다. 불을 건넌 이름들, 마침내 평안에 들기를...



# Ralph Vaughan Williams, The Lark Ascending (종달새의 비상)

영국 작곡가 본 윌리엄스의 대표작입니다. 이 곡은 1914년에 처음 쓰이고 1921년 런던에서 초연된 작품이에요. 대학 도시, 그리고 크라이스트 처치의 맑고도 고요한 첫인상에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지금은 고요하지 않고 번잡한 관광도시의 느낌이 더 강해졌지만...)


Ralph Vaughan Williams, The Lark Ascending (종달새의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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