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만 묻다 웃어버린 하루

LONDON 마리아를 만난 날

by 혜솔

먼 길, 짧은 하루


옥스퍼드 서커스역,

베네통 초록 간판아래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밀려드는
다채로운 물결 사이로 흔들리는 손


코끝이 징 하다

이렇게 만났구나, 마리아


맞잡은 두 손의 온기로

타국의 계절이 감기는 오후

사우스뱅크로 발길을 재촉하는 너에게

나는 자꾸 고국의 안부를 묻는다

너도 나에게 고국의 안부를 묻는다


강변에 퍼지는

재즈 선율을 유영하는 웃음소리가

안부 속 가족들의 이름과 함께
보도블록 위로 부서져 흩어진다


따뜻한 저녁 냄새가 흘러나오는

건물과 건물사이 어디쯤에서

템즈강을 바라보며

묵은 안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길이 멀어 못다 한 이야기

하루가 짧아 꺼내지 못한 이야기

돌아가 율동공원을 돌며 다시 하자

햇살 좋은 날에


안부만 묻다 웃어버린 하루

그 강변에 바람이 분다


약속 장소는 옥스퍼드 서커스 역 앞 베네통 매장 앞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갔고, 나는 수많은 얼굴 사이를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리서 환하게 손을 흔드는 한 사람을 보았다. 대녀 마리아였다.

대학에 입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휴학을 하고 런던에 와 언어연수를 마친 뒤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런던 한복판에서 만난 마리아는, 내가 기억하던 아이보다 한참 앞에 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꼭 안았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주변 나라를 여행하느라 일주일 정도 나갔다가 어젯밤에 돌아왔어요. 좀 더 일찍 오셨으면 같이 여행도 했을 텐데요.”


반가움 속에 아쉬움이 잠깐 스쳤다. 우리는 컴퓨터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곤 했다. 아마 MSN 메신저나 네이트온 이었던 것 같다. 하긴 휴대폰은 2G 폰에 로밍도 하지 않았으니, 숙소에서 컴퓨터로 연결해 이렇게 만난 것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조금 더 자주 안부를 나누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함께 있는 하루가 먼저 소중해졌다. 마리아는 얼마 전 다녀온 스위스 이야기를 꺼내며, 런던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였는지 묻는다. 오늘은 아무 곳이라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템즈강 남쪽 사우스뱅크로 향했다.


사우스뱅크는 이름 그대로 강변을 따라 음악과 사람과 공기가 섞여 흐르는 곳이었다. 거리에는 재즈가 떠돌고 있었고,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따뜻한 음식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우리는 와가마마에 들어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마리아는 런던에서의 생활과 스위스 여행을 쉼 없이 들려주었다. 알프스의 공기가 얼마나 맑았는지, 혼자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아이의 눈빛은 템스강 물결처럼 반짝였다.

틈틈이 내 아들의 안부도 묻고 나는 마리아의 부모님과 연이 깊은 사이지만 자주 소통하며 지내지는 못하던 차여서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서로 쳐다보며 웃을 수밖에. 누가 더 고국의 안부가 그리울 것인가.

당연히 마리아였다. 훌쩍 지나간 1년이지만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 아들의 안부를 묻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 시간이 겹쳐졌다. 한때 아래윗집에 살며 날마다 얼굴을 보던 아이였다. 세 살이던 마리아와 한 살이던 내 아들은 남매처럼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우리가 이사를 하며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는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 한 벌을 사주기도 했다. 그 뒤로는 메일에 mp3 파일을 붙여 노래를 보내오며 안부를 나누었다. 내 아들이 고3이던 시절에는 집에 와 과외도 해주었다. 그렇게 기억 속의 어린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 제 힘으로 낯선 도시를 살아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런던 생활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마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아주 힘든 건 없었어요. 다만 집에서 돈을 보내주실 때는 좀 마음이 그랬어요. 엄마 아빠께 미안해서요. 그래도 언어 공부하러 온 거니까 열심히 했지요.”

그 담담한 말이 오래 남았다.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을 견디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고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는 사람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제 몫의 하루를 스스로 꾸려 가고, 마음 한편에 미안함까지 품고 사는 일. 그 시간을 지나온 얼굴은 조금 다르게 빛난다. 그날 마리아가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식당을 나와 다시 강변을 걸었다. 거리 악사의 연주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템즈강을 따라 흘러갔다. 그러다 마주한 곳이 밀레니엄 브리지였다. 세인트폴 성당의 둥근 지붕을 향해 곧게 뻗은 은빛 다리 위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마리아는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가 밀린 공부를 하며 복학 준비를 할 거라고 했다. 귀국 준비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 오늘 하루밖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고마웠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서로의 시간을 하루만큼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아니야, 이 하루면 충분해. 네가 여기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나는 큰 선물을 받았어.”

말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 도시의 바람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것, 모두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익숙한 집과 가족의 품을 떠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시간을 건너온 사람의 얼굴에는, 어린 날과는 다른 조용한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그날 우리는 각자의 다음 시간을 이야기했다. 마리아는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것이고, 나는 며칠 뒤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잠시 같은 다리 위에 서서 서로의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든든했다. 강물은 흐르고 흐린 하늘 아래의 런던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내 마음에는 봄기운이 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방향이 달라 헤어지는 길, 멀어지는 마리아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자라게 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라고. 그 시간을 혼자 견뎌낸 낯선 곳의 고독과 용기 또한 사람을 키운다고.

런던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대영박물관도, 템스강도, 오래된 건물들도 아니었다. 자기 시간을 통과해 조금 더 단단해진 작고 가녀린 한 젊은이의 표정이었다.


# 이소라-바람이 분다

마음이 한창 힘들었던 시기에 대녀가 보내준 음악 파일 속에 이 노래가 있었습니다. 대녀는 맘이 답답하고 어디론가 나가고 싶어 질 때 이 노래를 듣곤 했다네요. 바람을 쐬는 느낌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후련해진다나. 정말로 한때 그 말을 공감하며 듣던 곡입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대녀 마리아에게 이 곡을 선물하고 싶어 집니다.

https://youtu.be/mRWxGCDBRNY?si=GkDwQoz2PTHR1U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