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가 건네준 휴대폰

London/ England

by 혜솔
오래된 이야기다. 처음, 혼자 배낭을 꾸리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던 나 홀로 여행. 런던이었다.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이 함께 했던 더 오래 전의 여행들은 내게 여행이 아니었나 보다. 기어이 혼자가 된 후 바로 짐을 꾸렸던 이때부터가 진짜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mp3와 이어폰을 챙겨야 했던.

여전히 나의 이야기는 여정을 따라 여행지의 정보를 공유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무심함 속에서 발아하는 시 한 편의 씨앗만 품고 다녀야 했던 방황의 여정이다.


마음을 머물게 하는 도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지하철역,

잘못 나온 출구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낯선 도시의 찬 공기가 옷깃보다 먼저 마음을 스쳤다

가야 할 곳의 방향을 잡으려면 전화를 해야 했다
로밍되지 않은 2G 폰은 먹통이었고

구겨진 메모지 위의 번호들은
선명하면서 멀게만 보였다

공중전화박스 유리창을 바라보며
동전 없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그때,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난처한 내 앞에 멈춰 선다

그는 내 손의 메모지를 한 번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런던을 생각하면
유명한 풍경보다 먼저
그 저녁의 한 사람이 떠오른다

이름도 모르는 친절 하나가
오래도록

그 도시에
마음을 머물게 한다



2009년 3월 초, 히드로 공항에 내린 나를 맞이한 건 영국의 악명 높은 '으스스한 봄기운'이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피카딜리 라인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내 손에 든 종이 지도와 숙소 주소가 적힌 낡은 수첩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얼스코트(Earl’s Court) 역의 개찰구를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메모지에 적어둔 지명과 가게 이름들이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자, 낯선 도시는 순식간에 거대한 미로로 변했다. 출구를 잘못 나온 것이 분명했다. 로밍조차 되지 않는 나의 투박한 2G 핸드폰은 무용지물이었고,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주머니 속에는 공중전화기에 넣을 동전 하나 없었다. 예약된 숙소를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조금 다급해졌다. 나는 수첩을 쥔 채 안절부절못하며 전화기 앞을 서성였다. 어디서 동전을 좀 바꿀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때였다. 몇 발짝 떨어진 상점 앞에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나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는 아주 정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손의 메모지를 가리켰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내가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보여주자,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러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신호음이 가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그 찰나,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추는 듯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통화가 끝나고 전화를 돌려주며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조심히 가세요"라고 나를 격려해 주고는 다시 일행에게로 걸어갔다.


그날 밤, 나는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밤하늘은 낯설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품은 장엄한 도시 런던은, 나에게 가장 먼저 '다정함'이라는 첫 문장을 그렇게 선물해 주었다. 십 수년이 흐른 지금도 런던을 떠올리면 대영박물관의 웅장함보다, 얼스코트 역 근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느껴졌던 그 사람의 따뜻했던 휴대폰 감촉이 먼저 생각난다.

가끔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인간의 선의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의 수첩을 다시금 어루만져 본다.


Heather Nova - 〈London Rain (Nothing Heals Me Like You Do)〉

이 곡은 1990년대 후반에 발표되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 유럽을 여행하던 이들의 플레이리스트에 꼭 빠지지 않던 상징적인 노래입니다.


낯선 이의 미소 같은 멜로디: 후렴구로 갈수록 고조되는 멜로디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낯선 이의 도움으로 스르르 풀리던 그 안도의 순간과 닮아 있습니다. 곡의 마지막에 잔잔하게 남는 여운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런던의 첫인상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