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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솔안나 Jul 21. 2016

추억 한 장 꺼내어 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

축구 유학을 갔던 아들이 브라질에서 귀국을 한 해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꽤 있어서 아들과 여행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들이 선택한 곳은 바르셀로나였다. 겨울이었지만 따뜻해서 걷기에 좋은 곳이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이틀째 되던 날, 성 가족 성당으로 가기 위해 시내 투어버스를 탔다. 얼마 후 밖을 내다보던 아들이 갑자기 내리자고 소리쳤다. 프로축구팀 바르셀로나의 전용구장이었다. 주변이 조용한 걸 보니 경기가 있는 날은 아니었다. 아들은 안내소로 뛰어가더니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시무룩해져 돌아왔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현재 휴가 중이고 유럽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올라간 팀은 레알 마드리드팀이란다. 그래서 이틀 후 이탈리아 유벤투스팀과 마드리드에서 경기를 갖게 된다는 정보였다. 아들은 갑자기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우리 마드리드로 가자. 실은 호나우딩요를 보러 왔는데 그 팀이 탈락해서 경기가 없대, 여기까지 와서 유럽축구를 못 보고 가면 안 되지. 유럽축구는 스타일이 우리와는 좀 다르잖아. 어떻게 다른지 현장에서 한 번만 보고 가자. 응?”

내 눈엔 어린아이 같기만 한 녀석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하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내 여행 계획에도 마드리드에서 톨레도까지 포함되어있기는 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보따리를 쌌고 그라나다행 야간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서는 하얀 별빛이 부서져 내리고 아들은 축구 경기를 관람할 생각에 들떠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라나다에 도착하니 아침 7시, 오면서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가 짐을 맡기고 아람브라 궁전으로 향했다. 마드리드로 왔다가 그라나다로 다시 내려갈 수 있는 시간이 될지 확실치 않아 하루를 그라나다에서 보내기로 했다. 아람브라 궁전과 그라나다 시내를 둘러보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다음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의 아토차역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거리엔 눈발이 날리고 있다. 우리는 먼저 숙소로 찾아가 짐을 던져놓고 무작정 나와 레알 마드리드 구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표를 예매해야 하는 게 급선무였다. 경기시간은 저녁 7시였지만 표가 매진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용구장에 도착한 것이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 속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 선 줄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냥 몰려 있는 게 아니라 꼬불꼬불 줄을 서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맥 빠진 모습의 나를 보고 아들은

“엄마, 걱정하지 마, 들어갈 수 있어! 시간도 많은데 기다리자 응?”

마치 동생을 어르듯 토닥이는 아들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줄을 서서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매표소 직원은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마지막 표 두 장 남았는데 자리가 안 좋은 곳이라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아들이 얼른 O. K 하고 망설이는 나를 막았다. 그런데, 표 값이 기가 막혔다. 한 장에 10만 원이 넘는다. 망설이는 내게서 지갑을 빼앗아 얼른 지불하고 줄을 빠져나오는 아들, 우리 뒤에 늘어섰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며 쏟아놓는 탄성……. 경기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나는 이미 지쳤고 아들은 신이 났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소리치며 지나갔다. 레알 마드리드팀의 서포터스들이라고 한다. 거리는 이미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스들로 가득 찼고 차량은 통제되었다. 입장이 시작되어 우리 자리를 찾아가는데 꽤 오래 걸렸다. 골대 뒤쪽 맨 꼭대기 층의 가운데 자리였다. 내가 실망할 줄 알고 아들은 미리 막을 친다.

“축구는 원래 이렇게 높은 자리에서 봐야 해, 시야가 넓어서 움직임이 잘 보이잖아.”

8만 명이 수용되는 자리가 꽉 들어차는 걸 보고 기암을 했다. 가끔 수원 월드컵 경기장을 가 본 적 있지만 그 넓은 경기장에 한 모퉁이만 채워질 뿐인 우리와는 비교가 되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 Santiago Bernabéu Stadium


경기가 시작되자 아들은 소리를 지르며 레알 마드리드 팀을 응원한다. 호나우도, 피구, 지단, 베컴 등등 세계의 유명 선수들은 모두 레알 마드리드 팀에 있었다. 그들의 뛰는 모습과 응원을 하고 있는 열여섯 살의 아들을 보며 어떤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잘 왔다. 잘 보고 있는 거다. 좋은 일했다.라는 생각, 그냥 그 생각만이 밀려왔다. 저 운동장에서 내 아들이 뛰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 왔다.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가 1:0으로 이겼고 8강 진출이라는 그 승리의 함성은 마드리드 하늘을 터뜨릴 것처럼 우렁찼다. 경기 종료 5분 전에 아들은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아끌며 서둘러 나가자고 했다. 사람들에 밀려 밟혀 죽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나가야 된다는 거다. 정말 그랬다. 열린 수문으로 거센 물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고 주변엔 자동차도 없다. 승리의 기쁨으로 넘친 사람들의 함성만 거리를 흔들고 있다. 지하철역까지 한참을 걸어서 호텔로 가는 차를 타고 겨우 숙소를 찾아온 그날, 아들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을 한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밤새 쏟고 또 쏟았다.

너무 비쌌어! 내가 투덜대면, 괜찮아! 그래도 그게 바로 축구를 보는 맛이었어! 하며 좋아하던 아들. 지금은 선수생활을 그만두었지만 잠시 프로팀에 머물 때까지만 해도 스페인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했다.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경기장, 멀고 먼 그 경기장에서의 추억을 다시 한번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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