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실업에 직면할 것이다, AI가 잘못을 저지르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어느 정도로,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를 두고 격론이 이어지다 급기야는 개발 자체를 중단, 억제하자는 의견까지 제기되고 있다. 기술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의 발명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인류의 의식주는 물론 시공간의 개념까지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와 방식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생활양식과 생활반경이 질적으로 달라지면서 문명과 문화, 사고방식도 달라져 수만 가지의 혁신이 파생되어갔다.
하지만 바로 그 기술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갔다. 이전의 농경시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하다 요절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런던 구세군의 관짝 숙소, 줄에 기대어 잠드는 행오버와 같은 숙박 시설은 당시의 처절한 노동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등장도 엄청난 혁신이었다. 시장, 자본, 금융은 ‘도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산성 발전과 효율성 추구의 발로다. 시장은 필요로 자연 발생한 것이며, 자본과 금융은 자연을 가공해서 도구를 습득하던 인간이 창출해낸 제3의 자원이자 제3의 자연, 제3의 생태계다.
스스로를 증식하는 돈인 자본은 인간의 ‘가능성’을 늘려준다. 실제 가지고 있지 않아도 대출 가능한 자산까지가 내가 가진 ‘가능성’의 범위가 된다. 엄청난 규모의 대자본이 (증식하기에 유리하므로) 한데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막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모든 방면에서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가시적인 발전이 이어졌다.
금융 또한 자본이 남는 사람에게서 필요한 사람에게로 가 유용하게 쓰여 양쪽 모두에게 실익을 주는 기술이다. 이들이 시장이라는 메커니즘 위에서 활약하면서 혁신적인 상호작용과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본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 앞서 말했듯 자본은 스스로를 증식하기에 유리한 쪽으로 ‘편중’된다. 사람이 아닌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경제체제이기에 사람의 논리가 짓밟히고 사람이 소외되는 일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만연해진다.
이렇듯 자본과 자본주의 자체가 가지는 속성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인 타격을 주어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인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전 지구적인, 인류 전체의 시점에서 조망했을 때에는 당장 취하는 효율 이상으로 막대한 인적, 정신적, 물리적 낭비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전가하는 비효율적인 메커니즘인 것이다.
AI,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이 기술을 염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인류의 의식주는 물론 시공간의 개념, 그에 따른 문명과 문화, 사고방식, 시스템, 사회경제 전반을 뒤흔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획기적으로 유용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일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렇듯 기술혁신에 곧잘, 잡아 먹혀왔다.
이미 맛보았는걸
그러나 기술개발을 막거나 억제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롭고 기발하다. 유용하다. 뭔가 더 할 수 있게 된다. 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맛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류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COVID19처럼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라면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합의에 따른 금지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공지능 개발의 문제는 수많은 견해의 차이가 있다. 일견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무슨 수로, 무슨 논리로 흐르는 물결을 막아낼 것인가. 금지하더라도 공공연히 존재하나 사회적으로 다루지 않는 음지가 늘어날 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사태에 처할 것이다.
세상을 뒤바꾼 기술혁신들은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가능성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꿈꾸게 한다. 자유로이 꿈꾸는 사람들을 막을 방도는 없다. 불가능한 대안을 논하고 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식칼이 하루아침에 사람을 찔러 죽이는 흉기로 돌변했다고 해서 ‘식칼을 발명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식칼을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받아들여질까? 최선의, 지속 가능한 대안인 걸까?
식칼은 어째서 위험해졌는가? ‘본래의 목적대로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 의도한 바대로 쓰였다면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선사해주었을 것이다.
증기기관도, 자본도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명확히 하고 쓰였다면, 그러한 기준 아래 쓰이도록 사회경제 시스템을 마련해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기술의 논리에 사람이 부림을 당하고 사회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논리를 굳건히 하는데 기술이 활용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고매한 기술일수록 사람을 위하지 않는다면 가장 치명적인 흉기가 된다. 사람을 위하지 않는 기술은 결국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기술의 논리로, 기술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부품으로, 사람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기술이 쓰이도록 만드는 역량’이다.
인류는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두려워지는 발명품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기계에 잡아먹힌다고 기계를 모두 부수고, 기계가 없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항구적인 해답이 될 수 없다. 이미 그 가능성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항구적인 답은 어떤 발명품을 만들어 내든 그 발명품에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뚜렷이 부여하는 일에 인류가 최대한 능숙해지는 것이다. AI, 인공지능은 도래할 기술혁신의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발전에 굴복하거나 발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주체로 발돋움해야 한다.
위험한 기술일수록 더욱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 금지하기보다는 써버릇해야 한다. 직접 써보기 전에는 어떤 것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써보고 작동과정을 익히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면 적극적으로 대응해 사람과 사회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역량을 갖추고,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사라질 것과 새로 생길 것에 대비해야 한다.
이때 천편일률적인 접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회에 긍정적인 부분은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보완책을 마련해 도움이 되는 기술로 만들어가야 한다.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목적을 기준으로, 규제와 자율 모두를 세심히 갖춰야 한다. 이에 가장 중요한 과업은 무엇이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길인지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나,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고통받나, 그에 맞게 기술과 기술로 말미암을 사회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갈까, 바꾸는 것을 논하는 가운데 지켜야 할 것을 끊임없이 환기해야 한다. 인문학과 과학, 사람과 기술, 진리와 혁신이 함께 공부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람과 사회를 위한 기술로
어쩌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환기를 그저 맞이할 것인지, 만들어갈 것인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이번에는 기술과 시스템에 예속되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주체로서, 기술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