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내일 갑자기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면'이란 가정
아직도 뇌리에 박힌 장면이 하나 있다.
어렸을 때, 아빠랑 함께 횡단보도를 지나 마을버스를 타고 나는 등굣길, 아빠는 출근길에 나서는 게 오전 일과 중 하나였다. 항상 발걸음이 빨랐던 아빠 뒤꽁무니를 쫓아서 마저 다 넘기지도 못한 아침밥을 오물오물 먹으며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들고뛰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성실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아파트 언덕을 영차영차 아빠와 함께 뛰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서 걸음을 멈춘 적 있다.
새하얀 솜털과 만년필에 꽂혀있는 듯한 뻣뻣한 검은색 깃털이 사방으로 날린 그날, 우리 아파트 아침을 깨우던 까치 무리 중 한 마리가 차에 치여 횡단보도에 사채로 남아있었고, 나는 차마 흥건한 피와 깃털들이 도로를 휘감았던 그 장면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나의 놀란 마음은 알아주지 않는 초록색 등이 깜빡거리자, 아빠는 내 손을 잡아끌며, 시간표대로 정류장에 도착한 마을버스에 타게 했다. 마을버스에 타서도 어떤 차에 치였는지, 처절하게 죽어버린 까치의 사채를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까치 생각만 했고, 그 장면은 25년도 훌쩍 넘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지금도 자카르타를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온갖 설치류의 사채들. 온갖 내장이 작은 몸을 감싼 털과 피부조직에서 터져 나와 구역질이 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민도 느껴진다. 어찌 되었든 이 징그러운 장면을 목격하는 게 굉장히 힘든 나로서는 멀리서도 동물 사채 비슷한 것이 보이면 무조건 눈을 가리거나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을 걷더라도 무조건 그 주위를 걷지 않는다. 일종의 트라우마 거나 공포증인 것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좀 자주 하는 편이다.
그 주어가 내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특히 도로를 걷다가 그리고 갑자기 어렸을 때 등굣길에 보았던 까치와 비슷한 형상을 마주하면, 나의 죽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주 어린 마음에 부모님은 항상 내 옆에 있는 존재, 그리고 내 동생도 내 옆에서 항상 까부는 존재로 여겼다. 지금도 그렇긴 해서 내 가족들을 설명할 때 쓰는 문장은 웬만하면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시제를 사용하려고 한다. 마치, 그들을 묘사하는 문장이 '과거'가 되면 그 속에 갇힐까 봐 행여나 큰일이 생길까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때 만나 오랜 연애를 걸쳐 지금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가족의 일원이 된 내 짝꿍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문장은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 또는 '미래시제'이다. 이만큼 나는 '내 가족이 내 옆에 없다면'이란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고, 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죽는다면. 이란 생각은 많이 한다.
언젠가 어렸을 때, 내가 죽으면 어디에 갈까. 내 시체와 내 몸은 어떻게 누구에게 전달되고, 내 장기는 어떤 사람들한테 가게 될까. 내 몸도 재활용이 될 수 있겠지? 내가 죽는다면 화장을 할 텐데, 내가 뜨거움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빼곡히 적은 일기장이 있었는데, 엄마가 청소하다가 그 일기장을 보고 서럽게 울었다.
아름답고 멋진 엄마가 우는 모습이 너무 슬퍼서 나도 덩달아 서럽게 울고 말았다. 다시는 우리 엄마의 예쁜 두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현듯 '내가 죽는다면'이란 생각을 쉽게 떨치기가 어렵다.
모르겠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다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정도의 목적의식은 없다. 그저 만약 내가 몸 쓸 병에 걸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게 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생을 마감하겠군.'이란 생각을 한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진 하지만, 삶의 기한만큼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만약 나의 생에 유통기한이 주어진다면, 왠지 시원할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아.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구나." 유통기한이 주어진 삶이 있다면, 조금 더 '만약'이란 가정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라는 미천한 존재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괜찮은데, 이상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죽어도 싫다.
올해 5월 마주한 갑작스러운 사촌오빠의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 후 아빠는 자기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불안증이 있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아침마다 '조심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라'라는 문자를 보내는데,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더욱 자주 한다. 유학시절에도 20살도 안된 어린 딸이 머나먼 타지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그런지, 아빠는 매일 같이 사고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40도 안된 사촌오빠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으니, 아빠는 조카의 죽음이 충격적이기도 한 동시에 나와 내 동생도 행여나 잘못될까 봐 매일같이 걱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하는 아빠의 건강이 나는 더 걱정이다. 그리고, 순리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를 앞서 세상을 뜨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불효지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부모님과 동생이 내 옆에 없다는 생각, 그 가정과 대비 자체를 할 수 없다.
배우자의 죽음.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
가와구치 도시카즈의 '커피가 식기 전에' 책을 보면,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 그리고 그 남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카페에 매일같이 방문하는 부인의 이야기가 있다.
몇 년 전, 집에서 소파에 기대 쭈구린채 그 이야기를 읽는데, 얼마나 슬프고 서러웠는지 눈물이 앞을 가려 지금도 책에 눈물자국으로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 그 하나만으로 그리고 서로가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편해서 결혼한 우리 둘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 이상한 감정이입 때문에 주책없이 눈물을 뽑아냈다. 그리고, 한 번은 불안장애 증상이 심각해져서 회사를 조퇴하고 집에 왔는데, 이 모습을 본 짝꿍이 많이 놀랐는지, 그 큰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행여나 내가 어떻게 될까 봐, 그때부터 매일같이 내가 편안한 마음을 갖길 바란다고, 자기는 지지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기나긴 속눈썹과 짖은 쌍꺼풀, 그리고 큰 눈동자를 가진 그의 눈동자는 매일 같이 샛별처럼 반짝거리는 데, 그날 아내라는 자의 힘듦을 목격한 그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이 한없이 서러워 보였다. 그래서 우리 남편 눈에서 눈물 뽑지 않게 해 줘야겠다. 이런 마음이 앞서면서도 왜 이렇게 '만약 내가..'란 가정이 머릿속에서 안 사라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삶이 무료하고, 정신적으로 고단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실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 목숨을 다 바쳐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가식적인 사회생활이 힘들고, 불현듯 죽음의 소식들을 그리고 장면들을 마주하면, 자동적으로 '나의 죽음'의 시나리오로 이어지는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내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장기기증서도 서약했고, 그날이 오면 내 몸은 잘 재활용되길 바라뿐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는 그 발걸음이 너무 무겁지는 않길. 그리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