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행복이라는 것에 집착해야 하나.
월화수목금토일. 365일 같은 날씨, 새벽 5시면 적도의 허공에 퍼지는 아잔(Azan)소리.
이 모든 것들이 무덤덤해지고, 굳이 일상 속에서의 행복이니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니 따위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옆으로 누워 연신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온갖 인상을 찌푸리면 일어난다. 억지로.
억지로 일어난 몸을 일으켜, '자본주의에 묶인 몸이니 회사라는 곳으로 가는 수밖에.'란 탄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꾸역꾸역 쓰디쓴 커피를 온몸에 윤활유로 삼아 흡수시키고, 질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를 휘저으며 사무실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어렸을 때는 멋있어 보이던 고층빌딩의 카드키, 내 얼굴이 박힌 출입증이 참 대단했다. 지금은 마치 버릴 수 없어서 가지고 있는 애물단지 같다.
인간이라 모름지기 두 발로 지탱하며 대지를 걷고, 양손을 활기차게 뻗으며 앞으로 직립보행하라고 배웠건만,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강요받고 있다. 세 차례의 출입증 접촉으로 3평 남짓한 사무실에 도착하며, 컴퓨터를 켜고 그 앞에 앉는다. 직립보행을커녕 두 발로 서있는 것조차 하지 않는, 의자라는 편리함을 빙자한 감옥이 나의 온몸을 수동적으로 지탱해 준다.
내가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신체조직은 손가락 정도다.
창문이 없는 이산화탄소 가득한 이 공간에서 실리콘으로 마감된 큰 통유리문 너머에는 자카르타 북부 저 너머에 자카르타 해가 보인다. 지평선 위에 홀연히 날아다니는 비행기, 그리고 거리곳곳에서 불쑥 솟은 나무들 그리고 붉은 지붕의 집들과 판자촌. 다른 한편에는 연중 콘서트가 끊이지 않는 GBK 운동장과 만년필을 연상시키는 자카르타의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다.
이 광경을 보는 것도 이제 즐겁지 않다. 그냥 아무렇지 않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느껴야 하는지, 이 것 역시 의무인지 이런 생각뿐이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말에 착안하여 '비관은 나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사에 비관적이다. 사람은 전혀 선하지 않은 존재이고, 사랑은 없다고 믿는다. 생존이라는 인간의 기본 본성이 채워지니 사치스럽게 사랑이나 인간의 선함 따위를 이야기한다고 굳건히 믿는다. 그래서, 사무실에 있으면 작년보다 더, 어제보다 더 비관적인 생각들로 뇌세포 전체를 지배한다. 억지로 행복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면 탈 난다고 하며 비관적으로 나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본다.
나에게는 이런 방식이 이상하리만큼 편할 뿐이다.
특별한 서사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생의 만족감? 흠..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외롭지도 않다. 오히려 제발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뿐이다.
이유 없는 어두움이 삶을 지배할 때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일부러 옷도 어두운 색만 입고, 사무실 전체도 최대한 어두운 조명으로 설치했다. 90년대 감성이 물씬 나는 백색등이 아닌 초록색 전등갓과 금색 스탠드 그리고 백열등 나는 느낌의 Reading Light 하나에 의존한다. 나에겐 밝은 조명이 어울리지 않고 모든 기운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행복(幸福)이라는 이 말. 사전적 의미로는 복된 좋은 운수라고 하며, 이 말은 기쁨, 만족감, 그리고 웃음 등 긍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들이 '행복'이라는 이 단어 하나로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복잡하기 이를 때 없는 나란 사람의 감정은 행복을 거부한다. 숲 속에서 길을 잃어도 좋으니 무심코 걷고 뛰어야 한다. 숨이 차서 더 이상 침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내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가 사라질 때까지.
웃음을 강요하고 마치 절대적인 인간의 조건인 것처럼 행복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기어코 검은 양이다. 어떤 것이 나의 심리적인 안녕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도대체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낄낄거림을 참을 수 없다. 그럴 바엔 그냥 무표정으로 하염없이 울어도 좋으니, 그 울음 속에 내 얼굴 전체가 잠겨도 좋으니, 웃지 말고 우는 편을 선택하자고 그렇게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