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할 수 없는 기분과 분위기
독일어 가운데 영어나 다른 나라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이나 표현이 되지 않는 언어로 'wanderlust'라는 말이 있다. 거닐다+욕망의 합성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여행, 산책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거닐면서 사색을 하는 것, 거닐다는 그 행위에 온전히 나를 담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말에도 참 그런 말이 많은 것 같다. 다른 나라 언어로는 완전히 번역이 되지 않는 그러한 것들. 눈치, 정 등이 그러한 말의 카테코리에 들어가는데, 이 모든 것의 원천은 '정서'인 거 같다. 정서(情緖)는 순우리말은 아니고, 한자어이긴 하지만, 어감과 활용도 측면에서는 순전한 한국어의 반열에 올랐다. 뜻을 의미하는 정, 그리고 실마리를 의미하는 서. 사전에서는 이 오묘한 단어를 크게 2가지로 정의한다.
1.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
2.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 진행 중인 사고 과정이 멎게 되거나 신체 변화가 뒤따르는 강렬한 감정 상태이다.
즉, 내 머릿속과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위주로 그것들이 산발적으로 어지럽혀지면서 동시에 정리정돈되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 첫 번째 정의는 '일어나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이라는 피동태로 써서, 마치 외부의 요인이 감정을 정한다고 설명하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정서란 태어날 사람에게 세상에 나올 첫 장소, 인종, 가정, 환경 등이 암묵적으로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물려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아도 생긴 그 자격과 요소들을 끊임없이 싫든 좋든 관계없이 반복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그 사람의 기분과 분위기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그런 상태가 된다. 마치 담론을 형성하듯 제각각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반복하게 됨으로써 당연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 대 국가 간의 차이점을 이야기할 때, '우리랑 정서가 다르네.'란 말을 자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서는 아무래도 상식의 의미가 강한 거 같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들 그리고 통념이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면, 서유럽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civil partnership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합의하 - 이성과 동성 커플 모두 - 아이를 양육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가정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그들의 정서이다. 우리는 이와 달리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 사회 안에서 특이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 양육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결혼이라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암묵적 사회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것 역시 한국식 '정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서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기도 한다.
나는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동시에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나'라고 규정하진 않는다. 이미 내가 만들어지게 된 그 계기는 부와 모의 합의하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이 잉태된 것이고, 잉태의 과정 속에서 나는 이미 일정 부분 외부 요인에 의해 어느 정도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 내 신체가 맞닥뜨릴 환경적 요인, 이를테면 가족 분위기와 식생활 등을 의미한다.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들이 분명히 한 명 이상은 이 지구상에 존재할 텐데, 우리 모두의 정서는 제각각이다. 저마다 다른 것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하며 불편한 상황에 대해서도 수용가능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기준이 다 다르며, 결국 그래서 가치관도 다르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복수의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정서는 무엇인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의 무조건적인 확보, 가족에 대한 그리움, 원칙주의자, 정으로 둔갑한 간섭 그리고 개입에 대한 진절머리, 정리정돈, 단체행동과 생활 극혐, 소금과 후추를 멀리한 음식과 재료 본연의 맛과 그 모습이 보이는 음식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규정하는 입맛, 다양성 인정.
아무래도 저렇게 열거한 요소들이 살아갈수록 다듬어지거나 바뀌거나 혹은 추가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 열거한 감정들과 개념들은 거의 30년 넘게 나를 규정해 온 것들이라서 얼마나 많이 바뀔지는 모르겠다.
Wanderlust까진 아니어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돌아다니는 공간은 심하게 북적거리지만 않는다면 도시도 좋고, 동네도 좋고, 숲 속도 좋다. 두 다리가 움직일 때, 마치 시동을 거는 오토바이처럼 머리가 움직인다. 두 다리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실타래처럼 엉켰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정리정돈이 된다. 며칠 동안 방치한 방을 정리하듯 그리고 더러운 이불을 깨끗하게 빨래서 따뜻한 햇빛이 비추는 날 걸어서 말리듯 그렇게 하나둘씩 치우면서 머리 안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정리정돈이 습관화돼서 그런지 그렇지 못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괜히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나는 걸어야 한다.
걸을 때, 두리번거리거나 구경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걷는 것 자체로 이미 불만이 해소된다.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두리번거리는 그런 행위를 할 때 시각을 통해 입력되는 불필요한 정보들이 또 괜히 머릿속을 더럽히기만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러한 정서를 가진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실은 굉장히 고통스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회사라는 장소가 개인 사무실을 제공해서 견딜만하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입력되는 모든 자극들이 괴로운 편이라서 이 두 개가 잘 처리되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공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하는 직업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은 더 뚜렷해지고 있다. 갇힌 느낌, 그리고 실제로도 갇혀있는 이 상황은 내 두 다리를 한 공간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다리가 묶여있어서 제대로 마음 놓고 걸을 수가 없다. 걸을 수가 없어서 머리 안에 몇 년간 쌓인 쓰레기와 얼룩을 지우기가 상당히 어렵다. 의지박약이긴 하지만, 나의 정서는 온전히 걸어야만 불안해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걸을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조금은 내가 덜 갇힌 공간에서 소통하며 노동을 제공하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
정서가 불안한 현재로서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이 고역이고, 무엇을 해도 즐겁기는커녕 집중도 잘 안된다. 집중을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런 내가 스스로 참 못난다고 생각하기 정말 오랜만이다.
이 합의될 수 없는 정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그 고민 속에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그 결심 속에서 나머지 하루를 지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