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낭만질색

세상은 아름답지 않지만 그냥 그렇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

by 안나

오늘도 12시간 넘게 새장 같은 공간에서 컴퓨터의 불빛을 벗 삼아 지냈다. 할 일이 많다기보다 집중이 잘 안 된다. 글 한 줄 읽고, 딴짓하고 그러다가 한 3줄 읽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중력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억지로 하는데도 그것조차 미루고 또 미룬다. 그러니 능률이 더 안 오를 수밖에.


어제는 정말 하루 종일 딴짓만 했다. 그러다가 얼마나 노곤했는지 사무실 방문도 닫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참 낮잠도 잘 수 있는 회사 라니, 어찌 보면 불만과 냉담함은 내가 느낄 게 아니라 회사 몫이 아닐까 억지로 반성도 한다.


오늘은 그렇게 미루고 미루었던 일들 3가지를 마쳤다. 저녁 6시가 되면 지체 없이 선홍빛 해가 자카르타 하늘을 수놓으며 그렇게 귀갓길을 맞이한다. 그 하늘을 보지 못한 채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사무실을 나왔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플라자 스나얀이라는 곳에는 사무실 건물과 쇼핑몰을 사이에 두고 큰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는 저녁시간이 되면 한 시간 단위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분수쇼를 한다. 이 쇼를 삼삼오오 앉아 구경하고 연인들은 회사 끝나고 데이트를 한다. 오늘은 꽃다발을 사들고 여자친구인지 연인인지에 건네는 남자를 보았다. 여자친구는 기쁜지 그 꽃다발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있었다.


이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그나마 보였으면 기분이 좀 나아졌을 수도 있을 텐데, 이 모든 게 다 질색이다. 특히 낭만을 강요하는 그러한 장면들이 내 시야에 등장할 때마다 거부한다. 낭만이란 원래부터 사기였다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울부짖는다.


내 가슴속에 병이 있는 것도 맞는데, 그다지 힘들고 고단한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려 만든 사회의 구조가 괘씸하다. 나의 우울감과 무기력함도 인정해 달라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눈물을 삼키며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때까지 그렇게 파낸다.


잘 참는 것도 재능인가 보다.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또 눈가에 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주책맞다.


낭만의 순간을 느꼈던 날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시 돋친 생각과 글 모두 낭만을 부정한다. 세상이라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곳에 생명체로 남들과 부대끼면서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누가 알 것이며 알아주겠는다. 내 인생, 누가 알아달라고 사는 것은 아니니 그냥 낭만 따위 나는 질색이라며 그렇게 고개를 휘휘 젓는다.


자카르타의 지긋지긋한 교통체증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어지는 택시기사와의 실랑이. 차라리 이게 더 현실적이라서 낭만에 가려지지 않아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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