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자위
나는 이렇게 한가로운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의 빌딩에서 컴퓨터를 '씨름'의 대상으로 보며, 모든 것이 지겹다고 한탄하고 있을 때, 이란 상공을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중폭격기로 일반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싸움을 목격하지 않는 울타리 속에서 주제넘게 '우울'하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사이렌 소리와 굉음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내일'을 예상할 수 없는 그들의 삶 앞에 '내일'을 '오늘'과 같은 또 다른 반복적인 하루라고 벌써부터 지겹다고 꼴값을 떠는 나 자신이 참 한심하다.
벽돌 하나 만드는 것도 1시간 이상이 소요되는데, 쉴 새 없이 미치광이처럼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의 발악 속에 모든 것은 무너진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명예도 그 잿더미 속에 사라진다. '하느님의 축복 속 (God blessed) 미국(America)'이라는 나라는 왜 그 축복을 공격으로 바꾸어 한 나라를 공격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정학이라는 마치 있어 보이는 이 개념조차 다분히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왔던 미국과 이 나라를 추종하는 똘마니들의 주장이다. 한 나라의 운명이 이미 정해진 '지리'라는 개념과 다분히 유동적인 '정치'라는 무형의 개념을 섞어서 '지정학'이라는 똑똑해 보이는 그 용어를 앞세워 '지정학적 위기'를 자행하는 악마적 세력을 처단해야 하는 명분으로 다른 한 국가를 침공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무력 강국과 침공 대상의 국가 간 비균등한 세력 다툼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당하는 국가 주제에 또 그 시민들을 괴롭히며 100 단위로 사상자가 발생하는데도 자기네들의 안위와 믿음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 행위도 징그럽다.
원칙과 인권을 외치던 유럽, 그리고 캐나다 그리고 호주 조차 막무가내 트럼프의 행동에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할 뿐이다. 스페인 총리, 프랑스 대통령, 영국 총리도 트럼프에게 나름의 쓴소리를 외쳤으나, 여전히 상황 변화는 없고, 말로 위협하는 트럼프식 행동에 책임과 윤리를 회피할 뿐이다. 모두 위선이다.
우리나라 외교부도 입장을 발표했다. 모든 당사자들이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할 것과 교민보호를 우선시한 메시지 이 두 줄로 담백하다.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맥락과 현재 미국과의 관계, 한반도 정세,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버린 우리나라의 '지리적 운명' 때문에 저 정도가 최선이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선'이라는 가면을 완전히 집어던진 성명은 아니다.
선진국이라는 일종의 달리기 시합이 있었는데, 공정한 조건에서 모든 국가들이 달리지 못했다. 영양상태가 부족한 선수와 영양과잉 상태의 선수, 그리고 그 중간정도의 선수들이 공정하게 보이는 그 시작선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달렸다. 영양과잉 선수와 중간정도의 선수들은 편리한 조건으로 뛰었을 것이다. 모두 1등은 못했겠지만, 낙오되지는 않았다. 만약 10명 중에 절반 정도만 결승전에 진출하여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영양실조-영양부족의 선수들은 아마 7등 그리고 8등도 못했을 것이다. 이게 현재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배웠던 그 기준의 폐해이자 모순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안간힘을 다해 5등을 해서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선진국의 순위에서는 아직 '신생국'으로 분류되는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실현하고 인정을 갈구한다.
아직은 우리가 이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이 조금 낯설어서 그런지 아직도 우리나라 언론들이나 소위 여론주도층이라고 하는 자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 그리고 국제정세에 대한 담론은 다분히 영미권 언론을 인용한 보도, '외신에 따르면'이라는 그 말이 마치 보험인처럼 읊어대는 것이 나는 귀에 거슬린다. 왜 우리의 역사적인 맥락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언론과 여론의 담론을 서양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인가. 이렇다면, 우리 역시 '위선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믿어왔던 것들도 결국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결국에 바뀔 수도 있다는 그 가정 속에서 나와 다른 시각과 담론을 제치지 않고 불편해서 오히려 더 들으려고 한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들의 담론은 왜 그렇게 구조화된 것인가. 의문을 던지지만, 내 주장이 맞다고 고집부리지 않는다. 나의 줏대는 변화하지 않겠지만,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폄훼할 필요도 짓밟을 필요도 없다. 나와 다른 의견이 세상에 존재할 때, 내 의견을 다듬어나갈 수 있는 요소로 활용되면 된다.
'위선'이 디폴트값이 되어버린 지금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나의 신념은 이미 많이 훼손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표면적인 이익과 편리함 속에서 원칙을 등한시하는 그런 곳이 되고 있고, 모든 감정들은 다 '수치화'되고 있다. 이러한 삶 속에서 나의 신념은 자꾸 사회가 요구하는 위선과 합의해야 한다고 나를 유혹한다. 이 유혹 속에서 나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다가 결국 낙담에 빠지고, 세상의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 찾기 여정을 중단한 채 혼란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