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기대 고장

뿌옇고 텁텁한 마음뿐.

by 안나

이상기후인지 매일같이 주적주적 비가 온다. 구름 낀 하늘 속 해님은 더 이상 걷길 포기했는지, 안개가 자욱한 자카르타의 하늘은 정말 '자카르타'와 어울리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울적한 것이 어울리긴 하지만, 이 안개 낀 자카르타의 하늘이 자화상과도 같다.


원래 기대하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당장 내일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굳이 부정적으로 볼 일도 아니지만, 40대를 바라보는 내가 - 참 나이도 많이 먹었구나 - 자꾸만 '내가 죽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 참 이상하다. 그러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간 살아온 날들을 무의식적으로 반추하게 된다. 이 반추는 역순으로 흘러간다.


말레이시아에 공부하러 온 날, 그 첫 해의 숙소로 고생했던 날들, 사랑하는 나의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했던 구슬 같은 날들, 자카르타에 처음 온 날, 쾌쾌한 매연냄새를 뒤로하고 도착한 사치스러운 시내의 쇼핑몰 그리고 그곳에서의 첫 끼, 벨기에에서 돌아온 후 얻은 광진구의 직장, 브뤼셀 아파트 사기, 벨기에로 간 날 우리 가족의 배웅, 첫 키스, 첫사랑, 하루에 3시간 자고 공부했던 날들의 연속, 영국으로 처음 간 날, 아빠의 축 처진 어깨 그리고 닳디 닳은 코트 어깨 패드, 슬프지만 떨어뜨려 보내야 한다는 엄마와 동생의 마음이 눈물로 얼굴에 묻은 날의 배웅, 다니기 싫은 학교에 억지로 나가면서 땡땡이 궁리를 했던 날들, 첫 아이스크림, 그리고 놀이터에 나랑 헤어지는 게 슬프다고 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내아이. 이것보다 더 많이 단편적으로 모든 것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일보다는 어제가 더 귀중한 이런 날들이 반복이 되어서 이상하게도 슬프다. 슬픈 마음이 너무 커서 가슴 한쪽이 눈물로 꽉 차 결국 고인 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이면 썩겠지만 고인 물을 방류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리고, 방류법을 알아도 하고 싶지도 않다.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고, 원인을 파악하는 게 어렵다. 원인을 파악하면 뭐 하나 이런 생각과 함께 내년 아니, 당장도 내일도 기대되지 않는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니 무기력하다.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니깐 억지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무형의 내 정신이 유형으로 남을 테니, ' 하며. 어떻게든 족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심리는 추접하고 주책맞다. 나약한 주제에 또 남기는 거 하나 없이 사라지는 그러한 인생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솜사탕을 떼어먹는 아이가 한 번은 입으로 한 번은 마치 하늘에 던진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구름들이 줄지어 행진한다. 세상은 새로운 전쟁과 무책임한 말들로 두려움을 보통의 것으로 만든다. 편안함을 사치로 생각해야 하는 이 시대에 희망과 기대는 사치 이상의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나만 이럴 수도 있겠다.'란 생각도 한다.


안개와 매연이 뿌연 공기층을 덮어 사람들을 진압한다. 그리고 내 마음도 지배해서,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머릿속은 '그다음'을 연상하기 어려워 기대라는 것을 할 수 없어 고장이 났다. 언젠가는 다시 활짝 잇몸을 드러내며 웃을 수 있을까? 이것조차 기대라며 나는 오늘도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시간이 더 이상이 귀중하다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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