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유체이탈 방식이랄까
매일 밤, 권순표 기자님의 책 '오늘은 괜찮은 하루' 에세이를 한편씩 읽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의 책 한 편이 그대로 펼쳐진 채 반대로 뉘어있다. 깔끔한 문장, 군더더기 없는 직관적인 그 말들 하나하나가 나랑 참 달라서 '좋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 여백의 미가 풍부한 책에서는 집착하지 않는 삶. 그리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조금씩 진일보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며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그리고 핑계 대지 않는 청렴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참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거늘, 겉으로는 집착하지 않는 척 하지만 매 순간이 집착의 연속이다. 지금은 매일같이 변하는 중동의 상황 때문에 3월 말 예정되어 있는 여행길이 막힐까 봐 항공사 홈페이지를 하루에 12번도 더 접속한다. 챗 GPT와 Gemini와 거의 매일같이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예상까지 하라고 시켜서 나의 대화로그는 마치 항공사/여행사를 방불케 한다.
그 끝에는 '뭐 안되면 어쩔 수 없지. 그냥 환불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핸드폰 화면을 끄지만, 그다음 날이 되면 또 똑같은 집착 '짓'을 반복한다.
이 것 말고도 집착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잔상'에 대한 것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외할아버지가 내가 첫 직장에 들어간 후 갑자기 위암말기 판정으로 광주 시내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외할아버지 병간호를 하셨는데, 엄마를 보러 아빠가 동생과 나를 데리고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옆에 간이침대에서 쪼그린 채 앉아있는 엄마가 그냥 안쓰러웠다. 그래서, 엄마를 광주 신세계에 데리고 갔는데 - 그때가 엄마 생일 주간으로 기억한다. - 엄마한테 사회 초년생 월급으로 설화수 로션을 사줬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엄마가 갑자기 울컥하면서, '할아버지는 저렇게 아프신데, 엄마가 여기서 이렇게 속없이 행복한 게 죄송하네.' 라며, 그때의 잔상을 잊지 못한다. 우리 엄마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 보호로 컸던 소녀였구나. 란 생각과 함께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더 커서는 가족들과 함께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지하철을 타러 광화문역을 가던 중이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마주한 교보문고 빌딩 정면에 펼쳐진 대형 현수막에 아버지를 그늘로 묘사한 어떤 글 한편이 있었다. 그 글을 보던 아빠가 걸음을 멈추더니, '저 말 너무 멋있다.' 이 한마디를 했다. 평생 숫자랑 씨름하는 사람이고, 예술을 보아도 감흥이 없던 아빠가 저 글 귀에 큰 울림을 받아 가던 걸음을 세우고, 1분 남짓, 그 글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냥 짠하기도 했다. 우리 아빠도 한 때는 꿈 꾸던 문학소년이었겠구나.
이러한 잔상들이 문득 내 머릿속에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게 터졌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연기가 자욱하듯, 내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잔상들이 터진 후, 연기재로 사라졌다가 재발현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아니 내가 반복을 시킨다. 억지로. 울면서도 반복시키고,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것 같아서, 잔상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수놓으며 불꽃을 이루는 마차를 만든다.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할 그러한 마차를 말이다. 이 장식은 물론 아름답지만 한 편으로는 아름다워서 슬프고, 영원할 수 없어서 소중하다. 이러한 잔상들이 모여 더 큰 불꽃을 만들고, 나는 이 불이 이룬 꽃에 손끝이 타고, 머리카락이 모두 송두리째 타도 좋으니 사라지지 말라고 그렇게 집착한다.
동생, 그리고 남편 모두 나에게 잊지 못할 잔상을 남긴 사람들이다. 이 잔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기억인데, 이 기억을 망칠까 봐 그래서 자꾸 기억하는 버릇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앓아온 수면장애 때문에 눈을 감고, '양'을 세기보다 이 모든 잔상들을 내 꿈나라로 가는 길목으로 삼으려 계속해서 떠올렸다. 그러다가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으로 밤을 지새웠던 적도 많다.
권순표 님처럼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님 말고'라는 포기 아닌 '집착을 버리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지만, 이상하게 이 기억만큼은 아니, 잔상만큼은 머릿속 서랍에서 빼내고 싶지 않다. 내가 언젠가 죽어서도 나와 함께 유체이탈 하듯 잔상들을 가지고 함께 부유한다면 그렇게 공기 중에 내 기억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워지지 않고,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공기 중에 떠돌며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그리고 해방감을 느끼면서 살 텐데..., 라며.
미스트를 뿌린 것처럼 하늘은 뿌옇고 그 뿌연 공기층이 자카르타 시내 전체를 덮었다. 자카르타해(Jakarta Sea)는 보이지 않고, 저 끝에 있는 가장 높은 빌딩의 꼭대기도 구름인지 매연인지 아니면 그냥 수증기와 섞인 공기층에 모두 가려있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분출하고 있는 잔상의 불꽃놀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