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텍쥐페리와 백현진
나는 1987년 6월 29일생이다.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는데, 나는 내 생일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크다. 왠지 쿨한 3가지 숫자 조합 '629'.
우선, 87년 6월 항쟁의 그 끝에 노태우 대통령이 마지못해 직선제를 선언한 일명 629 선언, 그날 내가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넥타이부대로 은행에서 근무했던 아빠는 내 이름을 '민주'로 하려고 했으나, 왠지 모르게 어감이 촌스러워서 '민주'를 포기하고, 집안 내력에 따라 외할아버지에게 작명을 부탁했다. 나와 동생은 당시에 유행하는 그리고 무난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조금은 특별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들, 이를테면 우리가 힘겹게 싸워서 얻은 민주주의의 탄압이라든가 12.3 계엄에 대해서는 분노가 치민다.
629 선언도 내 생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긴 하지만, 정말 큰 이유는 내 생일과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의 생일이 같기 때문이다. 1944년 7월 말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전투기 조정사로 참전했던 생텍쥐페리는 하늘의 별로 사라졌고, 그는 1900년 6월 29일 리옹에서 태어났다. 44년을 지구에서 살다가 그의 역작인 '어린 왕자'의 결말처럼 하늘의 별로 사라진 것이다.
쌩떽쥐페리는 콘수엘로라는 남미 출신 미망인과 재혼을 했지만 둘 사이 자녀는 없다. 그가 생전에 남긴 글들은 반세기가 훌쩍 넘긴 지금도 회자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어린 왕자'는 어른들의 동화로 사막 같은 우리의 텁텁한 인생에 오아시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만, 쌩떽쥐페리 본인이 직접 그린 여러 삽화들이 다양한 굿즈로 상업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착잡한 마음이 들지만, 그런 모습이더라도 심리적 사막화가 우려되는 이 볼품없는 현대사회에서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쌩텍쥐페리는 살아생전 조금은 괴팍했고, 원래는 건축학도였지만, 학과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결국 위험부담이 상당히 컸던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적막한 상공에서 우편을 나르는 밤 비행, 그리고 전투기 조종을 통해 완전한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두 발이 대지에 붙으면 고독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아내 그리고 친구들과 그다지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온전한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편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 깜깜한 밤 높은 상공에서 별과 달과 차가운 공기가 전부인 그곳이 슬프지만 편안했을 것이다.
왠지 나도 모르게, 그가 느꼈을 편안함을 상상해보고 한다. 마치 629 생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리고, 최근에는 전방위 예술가인 '백현진 배우, 미술가, 음악가'님의 생일이 72년생 6월 29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백현진 님은 배우로 먼저 알게 된 예술인이다. 요즘 아침마다 '이직'을 마법의 주문처럼 되뇌며 집을 나서 새장 같은 사무실에 출근하다 보니, 틈만 나면 딴짓을 하기 일쑤인데, 그때마다 직장인들 2를 보면서 소리 없는 박장대소로 우울함을 다스린다.
후 부장님의 시니컬한 표정, 그리고 우아하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과 정확한 발음으로 꼰대성 대사를 하는 그 모습이 그냥 '나' 같단 생각뿐이다. 나의 생물학적 성별은 '女'이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15년 뒤 나의 모습은 후부장과 같을 것 같다. 거의 틀림없다.
그리고, 백현진 님에 대해서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그의 생각은 '백현진'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그 철학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목표를 정하고 달리기보다, 굳이 부정적이지 않은 '엉망'의 형태를 유지하고 때로는 받아들이면서 삶의 방향정도만 정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사는 내가 되는 것을 추구한다는 그 말은 내가 생각하는 바와도 비슷하다. 말을 단순히 '내뱉는' 그런 천박한 사람이 아니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 보지 않으면서, 온전히 내가 가장 편안하고 나에게 떳떳한 그런 사람으로 세상과 나 자신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 멋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백현진이라는 전방위적 예술가의 아우라를 감싸고 있었고, 그의 자유로운 사고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생일까지 629라니. '어쩐지' 란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이 629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뿌듯하다. 쌩떽쥐페리와 백현진 님 말고도 마커스 웨어링(Marcus Wareing)이라는 영국출신의 셰프가 있는데, 그 역시 629다. 정교함 그리고 우아함. 거들먹거리지 않는 순수함이 그의 매력이자 그의 음식 철학이기도 하다.
나 역시 언젠가는 그래도 발전적인 또는 번뜩일 수 있는 영감을 줄 수 있는 그런 629 생이 되어야겠다는 그 방향 하나를 세웠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각자의 철학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면 온전한 나로서 떳떳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