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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Apr 10. 2023

나는 그만 살기로 했다

거실 창 창틀을 밟고 올라선 순간이었다. 난간을 잡은 손에 쇠붙이의 서늘함이 감돌았다. 서걱거리는 먼지가 느껴지는데도 의외로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무게를 진 발 밑엔 창틀의 얇은 선들이 느껴졌다. 작두를 여러 개 놓고 밟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바람이 발가락을 훑고 지나갔다. 착륙 지점이 어디쯤일까 시선을 내려 보았다. 17층 높이의 이 집이라면 숨이 붙어있는 불상사는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천천히 얼굴을 그다음엔 가슴을 저 멀리 하늘을 향해 내밀었다. 밖으로 밖으로 더 몸을 내밀다 난간을 잡은 양손을 놓아야지, 그래서 영영 사라져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몇 시간 후면 그 사람이 저기 저 밑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는 내 등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와 잘 있었느냐고 묻겠지. 이제는 너무 익숙한 그 피곤한 얼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밖으로 몸을 날리면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게 달라진다. 그 사람은 집이 아닌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거기서 한때 나였던 덩어리를 보게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은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면 ‘남편’의 이름으로 행정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처리하고 마침내 이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현관에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와, 내가 섰던 난간을 보고 내가 썼던 칫솔을 볼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지?


내게 넓은 부엌을 선물하겠다며 이 집을 샀었다. 이사 전 텅 빈 거실에서 함께 소리를 지르며 웃었고, 이사 후엔 거실 창 밖의 노을을 보며 감격했었다. 큰 테이블에 의자를 잔뜩 사서 온갖 사람을 불러 집들이를 했었다.


그 사람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살리기로 했다.


나를 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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