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절대 알 수 없는 것
신혼 3년을 잘 버티면 10년까진 무난하게 산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만큼 같이 맞춰가는 3년이 가장 고비라는 의미다. 사귄 지 겨우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한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몰라 그랬는지 영원히 고비란 건 없을 거라 자신만만해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서로 상대가 성숙하다 믿었던 것 같다. 승현은 나를 깊고 넓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믿었기에 자신의 자유로움을 내가 어느 정도 허용해 줄거라 착각했고, 나는 승현이 감당해 온 과거의 시간들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가정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을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어떤 인생을 살아왔건 어떤 경험치들이 있건 간에 둘 다 결혼생활은 처음이기에 많이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의 말로는 '그만하면 괜찮은 신혼'이라 했다. 정산하듯 분기별로 한 번씩 싸웠지만 큰 일도 아니었기에 금방 화해했고 승현은 주로 져주었다. 승현은 평소에도 자잘하게 많이 참아주었고 나 또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주는 일이 많았다. 부부는 서로를 키운다는 말이 맞았다. 결혼은 TV나 소설에서 봤던 이야기와 전혀 달랐고 주위에서 들은 간접 체험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조력자란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자밖에 할 수 없다. 승현과 난 시행착오 속에서도 참아주고 견뎌내 주며 결혼이란 세계에 적응하게 서로를 도왔다.
하지만 인공수정의 과정을 겪는 동안 승현에게 느꼈던 서운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승현의 마음을 지금도 잘 알 순 없지만 그 또한 매사 뾰족하게 굴던 나에게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렵게 화해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승현은 내가 말하는 본인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기 힘들어했고 나는 그런 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만 힘들었던 이 일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권태기였을까.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또 소리 내어 싸웠고 견디지 못한 나는 잠옷을 입은 채 무작정 집밖으로 나왔다. 이전에 몇 번 비슷한 퍼포먼스가 있을 때마다 승현은 날 못 나가게 잡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대로 나가게 두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디로 갈까 생각했지만 늦은 시간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길이 나있는 곳으로 달렸다. 40분 정도 달리니 사방이 논과 밭인 곳에 있었다. 김포와 강화도 그쯤 어딘가인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곳을 혼자 달리고 있자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 자꾸 나를 혼자 두는 거야... 이럴 거면 뭐 하러 결혼을 했어...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 또 이런 감정을 두 번 세 번 마주할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이렇게 지지고 볶고 살려고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걸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결혼한 나에게 그는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되는 거라고.
나는 친정집으로 차를 돌렸다. 아마도 새벽 1시 혹은 2시쯤 되었던 것 같다. 불 꺼진 친정집에 들어서자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현관에서 엄마, 아빠를 외치며 오열했다. 각자의 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와 아빠가 놀라서 뛰어나와 나를 안았다. 무슨 큰일이 벌어진 줄 알았던 것이다. 내 얘기를 듣던 아빠는 와인 한 병을 꺼내왔고 우린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엄마와 아빠는 깊이 고민하는 듯하였다. 며칠 친정집에 있는 동안 승현과 나는 문자로 계속 다투었다. 그러다 결국 이혼이란 말까지 하게 돼버렸다. 결혼 전, 이혼은 어떠한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감정의 벽이 쌓이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 벽을 허무는 것에는 서로의 무수한 이해와 양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누구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벽은 허물 수 없다. 오해로 한 칸, 서운함으로 한 칸, 미움으로 한 칸... 벽은 더 높이 쌓여만 가다 결국 서로의 모습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애초에 그 문제는 사소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일 확률이 높다. 소통, 공감, 이해. 그것의 가장 기본은 대화다. 흥분하며 말하는 나와 입을 다물어 버리는 승현. 우리의 대화가 잘 되었을 리 없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그렇게 오해만 쌓였던 그날들.
승현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전기구이통닭집에 앉아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했다. 서로 의견을 좁힐 수 없었기에 당분간 아이를 갖는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 떨어져 지내는 사이 아빠가 승현을 불러냈다고 했다. 승현은 크게 혼날 것을 각오한 채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아빠가 부른 장소로 나갔다고 한다. 아빠는 한우를 사주며 많이 먹으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승현은 한우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아주 불편하게 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승현은 너무 죄송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승현은 죄송하다고 말했다 한다.
"잘 부탁한다."
아빠는 그 말을 전하며 승현의 등을 다독이셨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많이 후회했다. 나에게 주어진 감정의 몫을 친정부모님께 나누며 걱정을 끼쳐 드린 일에 대해서.
혼자 견뎌야 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그 후로 매일 나를 다독이고 다독였다. 엄마가 되는 몫에 대해, 내가 홀로 감당해 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의학의 힘을 빌려 아이를 갖는 건 누가 봐도 여자만 힘든 일이 맞다. 혼자서도 잘 버티는 것, 좋은 엄마가 되라고 쉽게 찾아오지 않는 아이가 미리 주는 선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1년 만에 다시 아이를 가질 결심이 서게 됐다.
+ 시험관 일지를 쓰게 된 것은 저와 같은 일을 겪는 분들과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제가 많은 분들께 위로를 받고 있으니 잘 쓰고 있는 게 맞나 싶습니다. 너무 솔직하게 쓰는 게 아닌가, 부족한 모습에 누군가는 은근히 흉보지 않을까 가끔 걱정도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이유는 이 일들로 하고 싶은 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로 단 몇 분이라도 어지러운 감정을 털고 마음을 추스르신다면 그 몫은 다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위로해주신 마음들로 힘을 얻어 계속 쓰겠습니다. 시험관 일지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