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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3. 2019

불안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아무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이 곳에서의 삶은 '불안' 그 자체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엔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갈 수 없었다.


더 이상 꼬박꼬박 통장에 월급여를 넣어주던 직장도 없었고

두 사람 몸을 뉘일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위한 서울 집 전세자금의 여유 또한 없었다.

친정집에 들어가 살만큼 남편은 뻔뻔하지도 못했고

시댁에 들어가 살만큼 나는 편안한 성격이지도 못했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서 하나씩 해결해나가야 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한 발짝 떼고 멈췄다가 또 한 발짝을 떼고를 반복했다.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홀더 시절에는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몰랐기에 살림살이를 제대로 갖춘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우리는 furnished apartment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오래된 소파와 매트리스에 곰팡이가 낀 푹 꺼진 침대가 우리의 신혼 가구였다.

눈물을 참아가며 침대 시트를 3장씩 깔곤 했다. 정말 신중하게 최소화된 생활용품만을 구매했었다.


남편은 조수석 안전벨트가 풀려서 고장나버린 98년 산 폭스바겐 골프를 몰고 일을 다녔고 나는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한인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 할 일이 있으면 Go Card를 충전해서 트램을 타고 사우스포트까지 나가거나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혹은 주말을 기다려야 했다.




남편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나에게 일을 하라고,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남편이었지만 남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여유가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집에서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루의 에너지양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니 남편을 괴롭히는 날이 많아졌다.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오니 대학 졸업장도, 토익 영어 성적표도, 경력 증명서도 그 무엇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내가 호주에서 처음 했던 일은 housekeeper 였다. 기술도 없고 영어도 서툰 나에게 많은 옵션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골드코스트 특히 서퍼스 파라다이스가 관광지이다 보니 호텔과 holiday apartment가 큰 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많다.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의 콘도식 아파트로 3개월 정도 일을 다녔다.


직업의 귀천은 나의 마음속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남들 일할 때 일하고 남들 놀 때 놀던 월급쟁이 었다. 그랬던 내가 여기 사람들 휴가철에 여행 와서 놀 때 난 그들의 침대보를 갈고 청소기를 돌렸다. 어느 순간 한 번씩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이 들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낯선 이가 더럽혀놓은 변기를 닦던 날도 있었다. 남들이 흔히 겪는다는 인종차별도 없었고, 페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같이 일하는 좋은 동생도 있었다. 그럼에도 서글픈 마음이 드느건 아직 회사원 시절의 삶을 버리지 못하는 내 마음 때문이었다.


- 회사는 싫어했지만 회사원을 놓지 못하는 모순적인 나를 인정했다. 앞으로 청소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호텔식 청소의 포인트들과 홀리데이 아파트먼트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게 되었다. 경험해봤기에 얻어진 결과물이었다. 매니저의 과한 친절과 호의가 부담 스러워 그만두었다.




몇 주 쉬는 동안 남편이 답답해하는 나를 위해 자전거를 사줬다. 자전거가 생겼으니 일을 구할 수 있는 범위가 조금 넓어졌다 싶었고, 영어를 쓰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보로 40분, 자전거로 15분 정도 거리의 스시샵에 웨이트리스로 일을 시작했다. 인품 좋으신 한국 사장님께서 운영하시는 가게였고 손님들은 95% 로컬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웨이트리스는 일본인이어서 영어를 쓰는 환경에 처음으로 제대로 노출되었다. 낮은 시급으로 시작했지만 사장님께서 시급을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인상하셨다고 했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 가능한 일요일 로스터는 제외해주셨다. 장어, 어묵 등 남편과 함께 먹으라고 가게 음식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가게가 몇 달간 휴업하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 남들이 말하는 한인 잡에 낮은 시급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시급은 금방 올랐다. 깐깐한 일본인 사수 친구 덕분에 어떤 영어 표현으로 예의 바르게 주문을 받는지 확실히 배울 수 있었다. 캐셔 일을 같이 보는 웨이트리스였기에 정산 마감, eftpos 마감, supplier 들에게 cheque를 발행하는 일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남들이 왜 하지 말라고 하는지, 해보고들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남의 말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로컬 고객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한인 업장과 한인 고객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한인 업장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돈이 조금 모였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오래된 폭스바겐 골프가 드디어 남편의 출근길에 퍼졌다. 차가 없으면 남편은 일을 하러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현금을 털어 오랜 시간 함께할 새로운 차 지프 삼삼이를 데려왔다. (레지 넘버가 33으로 시작한다.) 우리에게 돈 벌어다 주느라 고생하는 고마운 삼삼이. 우리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삼삼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못할 듯하다. 남편이 삼삼이는 끝까지 타다가 폐차할 거라고 했다. 여태껏 고생을 함께해 온 가족 같은 우리 중고차.

통장 잔고는 다시 바닥이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확실히 호주에 계속 거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적당한 차를 산 것인데 문제는 비자였다. 그와 나의 워킹홀리데이 비자 만료가 2주 정도 남아있었다. 독립 기술이민을 하던 스폰서 취업이민을 하던 우선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유학원에 가 상담을 받고 내 이름으로 영어회화코스 학생비자를 남편 이름으로는 배우자 비자를 지원했다. 2년의 시간과 함께 학비 부담의 무게도 얻게 되었다.


- 학생비자의 경우 학비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학생비자용 건강보험비이다. 학비는 학교 재량에 따라 분할납부가 가능하지만 비자기간만큼의 건강보험비를 일시불로 납부해야만 비자를 승인받을 수 있었다. 내가 어린 나이가 아니었고 우리가 부부였기에 생각보다 꽤 높은 건강보험비를 납부해야만 했다. 다행인지 회사원 시절 만들어놓은 신한카드의 힘을 빌려 대신 납부하고 수익이 생기는 족족 갚아나갔다. 우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빚이었다. 나도 남편도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주 울었다. 거주 상황, 우리의 금전적 상황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냥 우리에게 빚이 있다는 마음 자체가 너무 괴로웠다.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얹어진 기분이었다.


이 곳에 자리잡기로 결심하고 학생비자를 신청한 이상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주권이라는 목표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2년이란 시간을 벌긴 하였으나 남편의 스폰서를 빨리 구할수록 금전적인,  직업적인 안정이 보장되는 상황이었다. 남편의 당시 직장과 트레이닝 비자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변 사례들을 하나씩 접하게 되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영주권이 없으면 선택이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거주를 위한 다른 비자를 대체해야하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닫히기에 타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우리는 확고해졌다. 무조건 영주권을 빨리 취득하는 것이 심리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과정안에서 어떤 미미한 손해들이 있을지언정 쉽게 포기하고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꾀부리지 않고 정석대로 하나하나 바르게 정면돌파 해가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결론이었다.




학생비자를 갖게 되니 되려 일을 구하는 것은 쉬워졌다. 업주들은 6개월 이후에 떠나야하는 워킹홀리데이 홀더보다는 오랜동안 머물며 일할 학생을 채용하는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씩씩하게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러 나의 레주메를 놓고 매니저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긴채 나왔다. 운이 좋았다. 그가 매니저였다. 그날 오후에 다음날 트라이얼 해보자고 연락이 왔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오지잡이었다. 내가 일을 했을 무렵은 서퍼스 파라다이스가 극 성수기를 맞았을 때였다. 시급이 나쁘지 않아 주에 받는 돈이 세금을 제외해도 꽤 많았다.


- 번화가의 레스토랑이다보니 마감 시간이 항상 늦었다. 마감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씻고 누우면 밤 11시반, 12시 정도가 되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잠을 자지도 못하고 나를 기다려야만 했다. 서로 너무 피곤했다. 단 둘이 사는 이 곳에서 남편과 하루에 밥 한끼 같이 못먹는게 서글퍼졌다. 내 남편은 일요일 하루 쉬는 사람인데 이 곳은 일요일이 가장 바쁜 곳이었다.


- 남미에서 온 키가 180cm 넘는 어린 남자 동료들과 똑같이 일해야했다. 작은 체구의 나이많은 30대 동양인 아줌마라고 봐달라고 할 수 없었다. 똑같은 돈을 받는만큼 똑같이 일해야했다. 맥주병으로 가득차서 무거운 내 몸 만한 쓰레기 봉투를 쓰레기장에 갖다 버려야하기도 했고 의자를 오픈, 마감마다 날라야했다. 서빙 플레이트가 무거운 곳이어서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웨이트리스가 상황을 봐가며 디시워시 정도의 키친핸드를 같이 해야하는 곳이었는데 안쓰던 왼손을 너무 많이 쓰다보니 왼쪽 손목과 테니스 엘보가 아프기 시작했다.


성수기가 끝나갈 무렵 급격히 줄어든 로스터 덕분에 쉽게 일을 그만 두기로 했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급이 높았지만 높은 시급 만큼의 강도로 일해야했다. 절대적인 시급 말고 업무 강도에 따른 시급을 따져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보았다.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남편과 함께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시간대의 일이라면 더 고마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일수록

꼭 해야하는 유리한 일 보다는

내 상황에 맞추어볼때 하지 않는게 유리한 일들이 리스트업 되기 시작했다.

남들이 좋다는 일 말고 나에게 맞는 일을 하는게 더 중요해졌다.

가만히 있을때보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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