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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3. 2019

그래서 지금 너는 뭘 하고 있는데?

정말 원하는 것이라면,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 나는 이렇게 힘들었어.

- 애가 아직 없잖아.

- 우리는 한국에서.

- 그래서 그건 안되고 이건 이래서 안된대.

- 누가 그러던데 이건 이래서 나쁘다며.

- 내가 알아봤는데 뭐 그건 이래서 별로라고 하더라고.

- 같이 일하는 누구는.

- 우리 사장님은.

하아, 수도 없이 많다.


겸손한냥 자신을 낮추며

누가 더 힘들고 안 좋은 상황이었는지

'힘듦 배틀'을 하는 대화에 나는 너무 많이 지쳤다.


이런저런 옵션들을 자기가 다 알고 둘러보았지만

최적화된 답안이 없어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똑똑한 냥 포장한 현실회피형 대화도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류의 대화는

겸허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똑똑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해버린 핑계에 대한 합리화라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다.


그렇기에 저런 대화를 하고 나면 끝에 질문으로

"그래서 지금 원하는 게 뭔데?" 혹은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있는데?"를 꼭 물어야 했다.

난 말투가 친절한 사람이긴 하지만 마음이 친절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넋두리를 받아주어야 하는 언니, 누나, 동생은 더 이상 되어주기 어려웠다.


남이 힘들다고 하는 말에

'왜 저렇게 징징거리는 걸까.'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걸까.'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속으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점점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못됐다.

나도 저런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태초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군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로 이런 분류의 사람들을 만나면

예전의 내가 나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 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쓰이고 괴롭고 힘들다.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를 좀 더 강하게 유지하고 싶다.




얼마 전 가까운 지인인 한 동생이

"누님은 왜 나에게 이런 시간과 마음을 써서 같이 고민을 해주시는 거예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가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체가 굉장히 용기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로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했으니 기꺼이 마음을 주어야죠."


그 동생은 조금은 거칠고 불안이 많지만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이다.


스스로를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과 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남편은 늦은 나이에 군입대를 했다.

운전병을 하고 싶어 입대 전 1종 대형면허를 취득했고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

정말로 열심히 군대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그 공간에 있는 동안 어떻게 해야 시간을 아깝지 않게 보낼까 고민하다

나라에서 공부하라고 지원해주는 것을 다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에

- 지게차 운전기능사

- 트레일러

- 자동차 정비기능사를 취득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국제 운전면허증 1면을 보면

A, B, C, D, E 모든 칸에 스탬프가 박혀있다.


이사할 때 트레일러를 빌려서 단 둘이 이사를 끝낼 수 있었고

생활이 너무 빡빡했을 때에는 엔진오일을 직접 교체하는 것은 물론

손수 부품을 갈지는 않지만 메카닉을 만났을 때 

설명을 듣고 네고를 하거나 

교체가 필요한 부품의 우선순위는 쉽게 정리할 있었다.

여전히 내 차 펑크는 그가 잘 때워준다.


전문전인 기사가 아니고 기능사 자격증이고

큰 영향으로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아주 소소하게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간단한 자격들이 이민생활에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그가 이런 준비들을 미리 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는 내가 호주에 살러 오기를 결정하기도 전에

혹시 몰라 워킹홀리데이 세컨 비자를 받아뒀다.

사실 운이 좋아서 세컨 비자를 받을 수 있는 현장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는데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흘려보냈을 순간이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타일로 경력을 쌓아가면서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는 증빙을 만들어놓고 싶어 했다.

그때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영주권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지만

그는 혼자 자격증을 발급해주는 곳에 문의하여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현장매니저와 슈퍼바이저의 동의를 얻어 레퍼런스를 남기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언제나 보이지 않게 부지런을 떨었다.


미리 준비해놓은 덕분에 457 취업비자도 추가 서류 하나 없이

한 달 반 만에 무난히 발급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다.


4년짜리 취업비자를 받았음에도 그는 몇 달간의 휴식만을 가진 후

바로 영주비자 신청을 위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취업비자로 2년의 경력만 채워지면 바로 영주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2년 뒤 바로 영주비자를 신청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다.


옆에서 보기에 따라 취득해야 하는 점수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그런 건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기준이었다.

그는 자신을 언제나 객관화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말이다.


14전 13패 1승

1년 반에 걸친 영어와의 싸움에서 그는 우리가 영주비자에 필요한 그 점수, 1승을 거둬냈다.

정말 화가 날 때 아니면 이제 눈물이 잘 나지 않는 나는 그날 펑펑 울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1년 반 동안 옆에서 지켜봤다. 


주 6일을 4시 반에 기상해서 일을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책상 앞에 앉혔다.

침대에 편히 누워 잔 날이 없었다. 책상에서 먼저 잠들어버리는 날이 일쑤였다.

휴대폰 배경화면에는 쓰기 파트 템플릿이 언제나 메인으로 되어 있었고

리스닝 본문을 녹음하여 휴대폰에 저장하고 일하는 동안에도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영어 듣기를 했다.

주말에 차를 타고 외출할때에는 영어 듣기 파일 혹은 남편의 영어 말하기 연습하는 소리 둘 중 하나가 흘러나왔다.


몇 번의 시험을 응시해야 우리가 필요한 점수가 나올지 몰라 누구에게도 영어시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회사에 휴가를 요청하는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일이 끝난 평일 저녁에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작업복 차림으로 꽤 여러 번 영어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대부분의 영연방 국가에서 사용하는 ielts처럼 우리가 응시했던 PTE라는 시험은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 4가지 영역에서 고르게 필요한 점수를 받아야만 했는데 마지막 몇 번의 시험은 정말 인내와의 싸움이었다. 말하기 영역에서 항상 점수가 모잘랐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시험은 정말 1점이 부족했다. 화를 낼 수도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조용히 줄담배를 태우던 그는 언제나 그날 저녁 바로 다음 시험을 예약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목표하고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얻어내는 사람인지 함께하며 직접 목격했다.


그 중심에는 그의 자존감이 있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비슷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건 '가치관과 삶의 태도' 이다.

자기 내면속에 있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체화시키는 과정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더 좋은 방향으로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민생활을 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곳에서 나에게 주는 사회적 제도와 안정감이 아니라

바닥까지 내려온 낯선 곳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삶을 설계해가며 원하는 곳으로 올라갈지

고민할 있는 기회가 의무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남편도

사는건 원래 좀 힘들고 고되고 불공평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사는건 원래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단 한가지 전제가 있다.

내일을 아는 존재는 없다.


우리는 원하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의 우리를 잘 살펴주고 준비해야 한다.

내일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욕심으로 가득한 내일을 원해도 상관없다.

정말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준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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