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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2. 2019

누군가의 수고만큼 우리가 행복했다는 것을,

고맙고 또 고마운 한국 가족들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너무나도 추웠던 지난 12월의 어느 날,


초췌하고 까칠한 얼굴에 검정 상복 차림으로

나는 2년 만에 시아버님의 빈소에서 아빠와 언니들을 만났다.


그 차가웠던 날 서울에서 대구까지  KTX로 내려와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까지 도착한 나의 가족들을 만나니

이런 곳에서 이런 일로 몇 년 만에 재회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나를 위해 이 먼 곳까지 와 준 고마움이 교차하여 마음이 너무나도 편치 않았다.


시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두어 시간 머무르면서 

아빠는 소주를 몇 잔 들이켜셨고

언니들은 남편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게 나와 남편이 마음 쓰는 일이 될까 싶어

가족들은 기차 예매시간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큰 언니(사촌언니)는 너무 추워 보인다며

따뜻한 옷 사 입으라고 용돈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갔다.

식구들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뒤돌아 눈물이 났다.




장례식장 안내 모니터는 봐도 봐도 낯설었다.

돌아가신 아버님 존함 바로 밑에

남편의 이름과 며느리인 내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그랬다.

우리가 상주였다.

이 상황의 무게를 가장 많이 짊어져야 할 그와 나였다.

하지만 낯설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처음 알았다.

나의 남편은 장손이었고,

제사를 맡아 지내던 큰 집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들과 며느리의 역할로 열심히 살아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잊고 지내던 것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남편의 누나인 시누이었다.

시아버님과 소주 글라스 잔을 나누던 절친 같은 딸이었다.

그곳에서 어쩌면 가장 슬픔과 아픔으로 힘들어야 할 사람 중 하나였다.


남편의 누나이지만 나보다 2살 어렸던 그녀는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엄마가 되었고

내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변해있었다.

그 당시 그녀에겐 4살 딸이 하나 있었고 임신 6개월 차, 홀몸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는 한국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 회사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휴가를 내고

아버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고, 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나고,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고,

장례식장을 잡고, 모든 일을 챙겨 왔다.


그 날까지 혼자서 상황을 거의 꾸려왔다시피 했다.

얼마나 힘들고 벅찼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안쓰러울 정도로 씩씩함이 몸에 배어있던 그녀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볼록 나온 배를 한 번씩 쓸어주며 배 속 아가의 상태만 괜찮은지 확인하는 듯했다.


사진으로만 만나온 첫 시조카는 해맑게 장례식장을 돌아다녔고

처음 본 나에게 "외뚝모"라며 사랑스러운 눈웃음을 한껏 안겨주었다.




남편에게는 같은 집에서 어릴 적부터 함께 나고자란 사촌 3형제가 있다. '환 도련님들'

친형제처럼 함께 커 온 남편, 시누이, 사촌 3형제.


큰 도련님이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눈물로 했던 말이 나는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큰 아버지. 저희 삼 형제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고 자란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은 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안다.

사촌 5형제에게는 큰, 작은 두 분의 아버님이 계셨다.


'형'을 대구 사투리로 '희야'라 부르는 삼 형제는 낯선 형수를 너무 살갑게 대해줬다.

어찌나 예의가 바르고 일을 잘하던지 장례식장에서 내가 일을 하려 하면

"형수님. 쉬세요. 앉아 계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해요."를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상을 마치고 시댁에서 며칠 지낼 때 큰 도련님과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했다.

너무 많이 고생해서 고마운 마음에 그리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따로 보자고 했다.


"나 없어서 힘들었지? 많이 부담되나?" 남편이 도련님께 물었다.

"희야가 잘 지내면 좋지. 근데 한 번씩 부담은 됐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희야가 있으면 큰아버지가 나한테 안 물어보실 텐데

이것저것 상의하시고 물어보시는 게 한 번씩 있긴 있었지."


무뚝뚝한 대구 형제들.

남편은 침묵으로 그동안의 고마움과 미쳐 알아차리지 못했던 미안함을 대변했다.




빈소에서 두 번째 날 밤

아버님 영정사진 앞에 남편과 단둘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부인. 같이 와줘서 고마워. 정말 힘이 많이 돼." 무뚝뚝한 남편이 진심의 이야기를 했다.


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여보. 우리 너무 이기적으로 지내왔던 것 같아. 아무도 우리에게 뭐 해라 뭐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누나랑 도련님들이 우리가 없는 자리까지 다 채우며 지냈던 것 같네.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가 잘 지냈던 게 온전히 우리만의 몫은 아닌 것 같아."


"그러게. 그렇네." 


"어차피 우리는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야. 지금 이 상황에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더라도 그걸 해야 하는 건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될 거야.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누나랑 가족들 결정을 지지하기만 하자.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지."




사실 나랑 다른 성향을 가진 무뚝뚝하고 쿨한 시댁에 서운한 순간이 가끔 있었다.

그렇지만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게 되려 편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찾아왔다.


지난 6년간 호주에 살면서 '우리'만을 생각하며 달려왔다.

우리가 행복한 것이 행복한 것이고 그것이 인생의 최우선이었다.

그 마음과 생각이 이번 일을 겪으며 조금 변했다.


장례식장에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게 되는 가족 모두에게

그저 정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었다.


고군분투하던 시누이의 모습에서 그녀의 5년의 시간을 보았다.

설날, 추석, 생신, 제사, 크리스마스, 어버이날 등

모든 가족 일정을 혼자서 해내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결혼하고 가족을 일구고 아이까지 있는데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이제야 든다.

정말 많이 고맙다.


나의 자매님에게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친정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가 몇 해 전 작은 수술을 하셨을 때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언니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가족끼리 더 가까워지고 이해하고 격려하는

그 마음이 단단해져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호주에 돌아왔다.


우리의 자유로움은 그들의 수고로부터 나왔음을 알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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