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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g Apr 16. 2019

풍선껌

불면 터지는 일상

알림장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있었다.

1. 일기예보 준비물(색종이 캔)

H가 부연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모둠끼리 일기예보 방송을 만드는 역할극을 할 예정인데,

그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 역할에 따라 준비물을 나누어서 가지고 오기로 한 것 같았다.

문제는 알림장에는 그렇게 써넣고 친구들끼리 따로 약속한 준비물이 있는 것 같았는데,

H가 이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기억은 하고 있는데, 복기하여 정확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H 태권도 원장님께 문자를 보내 두었고, 오늘 아침 연락이 왔다.

이 통화에서 추가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모둠별 준비물 리스트를 대강 알게 되었다.

두루마리 휴지 심, 키친타월 심, 티슈 상자, 캔, 색종이...  그래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를 만들어야 해


그러면 깡통으로 만드는 거야?

아마도 그럴걸?
아니야 지우가~
나한테 뭘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깡통을 들고 찍을 수 있게 손잡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무젓가락 같은 기다란 거 아니었어?


으응, 나무젓가락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색종이는 작아서 캔을 붙일 수가 없으니까
이만~한 종이를 가져가야 해


이런 식의 대화가 아침 내내 이어졌다. 계속 실랑이를 할 수는 없으니 작은 종이컵, 긴 종이컵, 두루마리 휴지 심, 색종이를 챙겨 가져 가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코코포도를 하나 사서 H와 나눠 마신 뒤에 깡통 안을 대강 정리해 그것까지 지퍼 백에 담아 넣었다.


2019년 4월 7일 일요일. 중랑천 벚꽃축제 현장. 우리나라 축제는 어째서 이렇게 요란해야 하는가, 싶다가도 H와 J가 신나 하는 모습을 보면 그 까칠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별안간 차에 있던 풍선껌을 먹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는 바람에

언성을 높인 뒤에야 오늘의 H 등교 마중을 마칠 수 있었다. 일상의 흐름이 늘 이런 식이다.

너무나 일관성 있게 틀이 잡혀버린 중구난방의 일상이랄까. 결론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연속이랄까.

견고하게 패턴화 된 듯 보이지만 감정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일촉즉발의 위태로움이랄까.


바쁜 아침나절의 약 한 시간 가량되는 준비 시간 동안 H와 저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내 기분이 온전했을 리 없다. 아이들의 모든 것을 받아주기로 마음먹은 나지만

바쁜 와중에 느릿느릿 총기 없는 H를 어르며 일상을 구멍 나지 않게 메워가는 일이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침나절에 슬몃슬몃 나의 눈치를 살피는 J를 모른 체 했고,

안아주지 못하고 헤어졌다. 또 결국에는 H를 끝까지 받아주지 못하고 고작 풍선껌 때문에 버럭 호통을 치고 말았다.

그런 뒤에 운전을 하고 출근하는 동안 음악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내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H.. H... 카메라는 잘 만들었니..

H가 준비물 빠뜨려서 일기예보 못 한건 혹시 아니니..?'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은데도, H는 내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른다.



2019년 3월 10일 일요일. 중랑천 공원. 출발선을 떠난 H. 지금 어디쯤을 어떻게 가고 있니. 고모가 너의 속도에 익숙해 지도록 노력하고 있어.. H가 노력하는 만큼 고모도 노력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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