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 Day 8 오후 8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쓰다. 아직도 지난 주 씨네21 다 못 읽었다. 아껴서 야금야금 읽다보니 정작 못 읽고 있는 이 아이러니.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여름부터 못 마신 술을 미친 듯이 마시고 있자니 몸에 슬슬 무리가 오는 것 같다. 술 때문에 컨디션이 나빠지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또 다짐했다. 그래놓고 맨날 맥주 마시고 있다. 언행일치가 안된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항상 이런 식으로 망해왔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타이페이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한다. 타이페이에 도착 전에 잠시 홍콩 첵랍콕 공항에서 기다려야 한다. 비행기 시간이 좋아서 홍콩 경유 하는 캐세이 퍼시픽을 이용했는데, 승객들도 별로 없어 고요한 가운데 편하게 왔다. 아예 한국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이렇게 비행기로 도시를 옮겨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은 2015년 리스본-바르셀로나-파리 여행이 처음이었다. 그해 초 여름, 한 도시에서 보통 3일 정도 머물렀고 마지막 도시인 파리에서는 겨우 이틀 정도 있었다. 그래서 바로 옆 나라로의 비행은 그저 일상의 연장에 불과했다. 매일 같이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다가 캐리어에 짐을 쑤셔 넣고 새벽에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은 일종의 프로젝트였다. 인간이 하루에 얼마나 술을 마실 수 있는지 도시를 바꿔가며 실험하는 백해무익한 프로젝트. 거듭 후회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도대체 리스본과 바르셀로나에서 뭘 했는지 뭘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 곳의 그 누구와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 때는 그런 여행도 나쁘지 않다고, 동행자와 함께 웃고 떠들었지만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언젠가 리스본에 다시 가야지. 이렇게 아쉽게 여행을 마무리해야 다시 떠날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있다.
이번 여행처럼 본격적인 장기 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이지 싶다. 도대체 일도 안하는 주제에 여행을 간답시고 이렇게 마구 돈을 뿌리는 스스로가 여행 준비할 때는 매일 같이 한심했는데 막상 여기 와보니 이번 태국행이 서른 중반이 넘어 가장 잘한 결정 중 3위 안에 든다. 대만은 한 번 가봤기에 사실 큰 두려움은 없다. 타이페이에서 하고 싶은 것도 확실히 정해놓은 상태고. 문제는 거기 날씨가 지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라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일단 도착해서 고민해보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타이페이 여정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방콕과 마찬가지로 정말 하나도 고민하지 않고 가이드북에 온통 표시만 해놨다. 아마 표시만 해놓고 가이드북에 나온 곳은 가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여행지에 대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있다. 아 여기 와서 다들 이러고 노는구만. 나랑은 너무 다르구만. 그럼 나는 뭘 해야 재미가 있을 것인가.
태국 역시 영국처럼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나처럼 우측 통행을 하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은 종종 자신이 택시의 운전석에 앉으려고 하는 귀여운 실수를 저지른다. 기사는 웃고 승객은 더 많이 웃는다. 어딘지 모르게 정겨운 풍경이다. 이 소소한 해프닝에 밥을 먹다가 잠시 동안 큭큭 소리내서 웃었다.
오늘은 방콕에 와서 가장 미스터리한 하루였다. 스스로 부여한 미션을 무사히 완료할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까지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오늘 오전 계획은 바로 무에타이 클래스 수강이었다. 마침 호텔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무에타이 체육관이 있었고, 클룩에서 쿠폰을 판매 중이었다. 누가 일요일 오전에 이 수업을 듣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학생은 체육관에 오직 나 혼자 뿐.
핸섬하고 다부진 체형의 선생님이 나를 맞이하셨다. 나도 그 양반도 수줍어하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데면데면 했지만 운동복으로 갈아입자마자 한 시간 반 동안 미친 듯이 나를 굴렸다. 꼬꼬마 시절부터 무에타이 선수로 살아온 양반이라고. 경력은 20년. 10살 때 주니어 선수권(?)에서 우승한 사진과 본인이 현역 시절에 한 실제 경기 영상도 보여줬다. 실전은 겁나 살벌했다. 문제는 정작 이름을 제대로 못 들었네. 선생님은 무에타이 선수들의 성지인 룸피니 스태디움에서 경기를 뛰었던 초특급 실력자였다. 프리미어 리그로 치자면 웸블리에서 A매치를 뛴 것이다. 200경기 이상을 뛰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아 그런가보다 했는데. 엄청 대단한 선생님께 일대일로 레슨을 받은 거였다. 예를 들어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내게 영화 연출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고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영화감독이 바로 그다.
도착하면 일단 워밍업으로 제자리 뛰기 같은 가벼운 러닝을 시킨다. 워밍업만 해도 벌써부터 숨이 찬다. 그리고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물어본 다음 손에 보호대를 차고 잽과 펀치부터 시작한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은 잽, 오른손은 펀치.
저질 체력임을 감안하여 1분 혹은 2분 정도로 펀치를 한다. 조금 익숙해지면 훅이나 어퍼 컷을 연습하고 무릎과 다리를 이용하는 킥까지 나아간다. 사이사이에 30초 동안 플랭크나 스쿼트 자세를 해야 하는 것은 슬프지만, 필라테스 시간에 조금씩 근육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징징대면서 어쨌든 하긴 했다. 마냥 데면데면했던 선생님이 마지막 플랭크 자세에서는 내 등 위에 글러브 같은 걸 올려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깃털같이 가벼운 것이라고 해도 막상 등에 올려놓으니 배로 힘들어졌다. 선생님 미워요.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초보적인 동작을 배우기 때문에 자세를 세세히 잡아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아예 진도를 나가지 못할 거다. 그것보다는 배운 것에 익숙해지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잽 펀치 훅 킥 엘보우 등등 마구 섞어 가며 스피디하게 동작을 해야 하고, 그러면 난 혼이 나간다.
선생님이 손과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중간 중간 정확한 자세를 알려주고 일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쉬는 시간 사이사이에 연습을 한다. 사실 멀뚱멀뚱 눈알을 굴리며 쉬는 것도 민망하다. 선생님은 무에타이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을 가르쳐주면서 서서히 스피드를 올려가며 자비없이 몰아친다. 어떤 동작인지 간단히 서술하자면,
잽 - 왼 손으로 친다
펀치 - 오른 손으로 약간 세게 친다
가드- 양손을 얼굴 높이로 올린다. 가드 올려!란 말을 실제로 살면서 행동으로 옮길 줄이야.
훅 - 어깨를 크게 써서 팔을 가슴 앞으로 들고 수평으로 움직여 친다. 화실에서 소묘를 할 때 오른 팔 전체를 이용해서 선을 긋도록 하는데 그게 여기서도 응용이 될 줄은 몰랐다.
어퍼컷 - 왼 손 오른 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서 친다.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각도를 잘 조절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같은 초보자는 잘 다치거든.
엘보우 - 팔꿈치를 이용하여 마치 여자가 절 할 때처럼 팔을 수평으로 든 후 전방을 향해 사정없이 친다.
백 엘보우 - 왼 발을 앞으로 내민 후 오른 쪽으로 몸을 틀어 팔꿈치로 뒤를 향해 친다. 글로 써놓으면 그저 그렇지만 실제로 하면 엄청 간지 난다.
니 - 무릎으로 올려 찬다.
킥 - 다리를 쭉쭉 뻗어 사이드로 찬다. 지탱하는 다리도 적당히 오픈해야 올바른 자세가 나온다. 내가 오른 발로 킥을 할 때 선생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오늘 이 날을 위해서 나는 지난 삼십 여년의 시간 동안 건장한 하체를 키워온 것이다.
블록 - 상대방의 다리 공격을 막는다. 다리를 기억 자로 번쩍 들어야 하는 약간 잔망스러운 동작이다. 동작은 되지만 선생님의 기습 공격을 막는 데는 당연히 번번이 실패했다. 공격하기도 바쁜데 수비가 될 리가 있나.
내 앞에서 스파링 파트너가 된 선생님이 이 동작을 섞어서 마구마구 외치면 자세고 뭐고 나는 그 속도에 따라가기 바쁘다. 지금은 괜찮으나 아마 내일은 몸살이 올 것 같은데, 너무 힘들면 근육통에 좋은 약을 먹고(그렇다 나는 이것까지 챙겨왔다) 마사지 받으면 되니까 크게 걱정은 안한다.
대체로 모든 동작은 어설프지만 내가 오른 다리로 킥을 날릴 때 선생님이 훠우!라는 추임새로 화답하는 걸 보니 내 킥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째졌다. 나의 튼실한 하체가 킥에서 그 존재감을 폭발시킨 것이다. 드디어 알았다. 내 거대한 다리가 사실 이렇게 멋진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선생님이 나같이 푸딩에 쿠크다스를 합체한 것 같은 인간도 쉴 새 없이 굴려가며 부지런히 운동을 시켜준다. 나도 나를 잘 알지만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 그제 무엇 때문인지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고, 또다시 무기력한 기분이 들어 조금 힘들었다. 엄마 아빠 꿈을 꿔서 그런 건지. 그래서 그것에 대한 글을 쓰다 울어서 그런 건지. 보통 이런 경우는 불안 증상이 나타날 때인데 뭐가 그렇게 불안했던 건지 모르겠다. 어제 오후에 풀장 선베드에 누워 남자 아이돌들의 상큼하고 에너지 넘치는 음악을 들었는데, 이건 내가 정말로 피곤할 때 쓰는 방법이다. 너무 힘들어서 출퇴근 할 기운조차 없을 때 예쁜 청년들의 노래를 들으면 그나마 움직일 힘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늘어져있음 안되겠다 싶어 뭐 재밌는 게 없나 뒤져봤더니 클룩에 떡하니 무에타이 클래스가 있었다.
운동을 하면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게 격한 운동의 가장 좋은 점이다. 내가 지금 우울한 기분인지 아닌지조차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물론 이것도 아주 중증 우울증 환자일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항우울제를 꾸준히 복용한 결과, 보통 사람들만큼 정상적인 감정을 유지할 기력이 생겼고 그래서 필라테스같이 근력을 사용하는 운동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신감에 기인하여 무에타이 수업을 한 번 수강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지난 해 여름 처음 정신과 치료를 시작할 때 아직은 운동은 하지 말라는 처방을 받았다. 검사 결과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근력 운동은 버틸 수 없다고. 필라테스를 시작할 수 있던 것도 새해가 되어서였다. 그런 내가 방콕에 와서 무에타이를 배우고 있다니. 펑펑 소리를 내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발차기를 하고 있다니.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감격했다.
이렇게 온몸을 써야 하는 운동을 할 때는 굉장히 집중해야 한다. 이따 저녁에 뭘 먹지, 내일은 뭘 입고 뭘 먹고 어디에 가야 하지? 내일은 무슨 소재로 글을 써야 하지?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런 여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굳이 글을 왜 쓰고 있지? 나는 왜 살아야 하지? 이런 식의 나의 존재에 대한 심오한 고찰로 나아갈 겨를이 없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일 때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단순하다. 오직 킥을 할 때 손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반대 쪽 다리는 어느 정도 열어야 하는지, 선생님이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할 때 재빨리 막아야 하는데 어쩌지(물론 한 번도 방어에 성공한 적은 없다. 늘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당하고 나면 나는 역시 수비에 약한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든다. 대략 한 1초 정도. 거듭 말하지만 연습 중에 이런 자괴감에 빠질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내가 굉장히 멋진 사람이 된 착각마저 든다.
보호대를 착용한 손 위에 글러브까지 하면 더더욱 강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사실 아까 어퍼컷 연습할 때 왼쪽 손목을 잘못 써서 조금 아프긴 하지만 심각한 건 아니다.
린킨 파크 음악을 들으며 킥을 하고 있자니 액션 영화를 찍는 것 같아 아주 흡족했다. 제이슨 본이 이런 표정으로 전세계에서 사람들을 패고 다녔겠지? 나중에 찾아보니 지나 카라노가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수련한 실력자라고. 어쩐지 멋있더라니.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정신없이 발차기 및 펀치를 날리고 나니 어느 새 한 시간 반이 지나있었다. 초반 20분은 정말 시간이 가지 않더만, 수업에 몰입한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가는 걸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인가(아니다). 마지막으로 플랭크 30초를 하고 근육 이완을 하는 스트레칭 동작을 했다. 언뜻 느끼기에 내가 선생님보다 더 유연한 것 같았다. 내가 비록 다리 찢기는 되지 않으나, 요가에서 요구하는 많은 자세는 할 줄 안다. 은근 거만해진 표정으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를 진정시키며 체육관을 나섰다. 호텔방으로 돌아와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뿌듯한 얼굴이었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