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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5. 2019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마요

6/16 Day. 8 오후 10시 

일요일 오후, 한잠 달게 잔 후에 근육통이 있는 것 같아 진통제 하나 먹고 자주 가는 마사지 샵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디 앨런을 닮은 할아버지를 봤다. 정말 기운이 하나도 없게 생겼다. 


머리와 어깨 마사지를 받았더니 기운이 조금 생겨서 다니엘 펍으로 밥을 먹으러 왔다. 이 거리에 여기가 없었다면 조금 덜 행복했을 거다. 베이컨이 들어간 스티브 버거와 라즈베리 맛이 나는 맥주를 시켰다. 헌데 오늘은 음악 선곡이 별로네. 


종종 와이파이가 없는 곳에서 아이폰에 글을 썼더니 아이패드 메모장에 연동이 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추가로 더 쓴 글이 나중에 정확하게 연동이 될까? 믿어보겠다 애플 엔지니어들이여. 잠시 생각해보니 내 폰과 아이패드를 핫스팟으로 연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합체가 되는 메모장을 보니 새삼 또 감탄했다. 이제 이동 중이라 글을 쓰기가 여의치 않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오는 다니엘 펍 야외 자리에 앉아 아이패드 메모장을 열었다. 직원들 중에 이제 몇 명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아마 저 (중국)여자는 작가거나 기자인가봐 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뭐 딱히 대단한 관심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까 시킨 것은 라즈베리 향이 강하게 풍기는 가벼운 맥주였고, 두 번째로 시킨 것은 완전 흑맥주다. 조금 센 걸 마시고 싶어서 감잡히는 대로 골랐더니 이게 나오네. 


오늘 새벽에 20세 이하 월드컵 결승전이 열렸고 아쉽게도 한국의 아가들은 준우승에 만족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강인이 골든볼을 받았다고 하니, 개인으로서는 큰 성과겠지만 그래도 결승전에서 이기고 싶은 욕구가 훨씬 더 컸겠지. 졌지만 잘 싸웠다고 말해주기 보다는 앞으로 너희들의 축구 인생에 더 행복한 일이 많기를 바란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번에 우승하지 못한 것이 너무 큰 슬픔으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늘따라 펍에 미국인 손님들이 많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하프 파인트 맥주 보고 이게 과연 하프 파인트가 맞는지 당황해하는 걸 보니 은근 웃겼다. 미국인들은 정말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까도 대 여섯 명의 미국인들이 동창회에 온 듯 왁자지껄하게 떠들어서 일행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십년은 만난 것처럼 유쾌하게 떠들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졌다. 방금 전에 앉은 남자들도 별다른 낯가림 없이 본인들의 여행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그러더니 내가 마시는 흑맥주가 무엇인지 가타부타 아무런 인사도 없이 물어본다.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게 뭐요? 어... 이건데요. 오, 그렇구만. 고마워요. 


역시 미국인들은 낯가림이란 거 없다. 오 분 전에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사진도 같이 찍고. 내가 저들처럼 행동하려면 세 시간 정도는 술을 마셔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어리든 아니든 저들은 그저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려고 계산서를 달라고 했더니 나를 담당했던 친절한 남자 직원이 맥주 더 안마시냐고 물어본다. 글로벌 알코홀릭이 되어간다. 은근슬쩍 내게 물어보는 그 얼굴의 핀 웃음이 밉지 않다. 아즈씨 아니야 나 알코홀릭 아니야....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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