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 Day 8.
칼리-멕스 바 앤 그릴에서 엔칠라다와 모히토를 먹고 호텔 바로 건너편의 바에 와서 쓰다. '전쟁하지 말고 타코를 만들어'라는 표어가 떡하니 벽에 걸려 있는 곳이었다. 아시아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에 다 질릴 때에는 역시 멕시칸이다.
거하게 밥을 먹고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들어온 이 바의 이름은 ‘바 업스테어즈(The Bar Upstiars)’. 2층 같은 3층에 있는 곳이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생각보다 가파르고 층고가 높아서 이따가 호텔로 돌아갈 때 앞으로 데굴데굴 구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주말에 오기에는 너무 힙한 곳이다. 월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어서 쾌적하다. 이지 리스닝 재즈풍의 듣기 쉬운 음악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배경음악으로 정통 힙합이 흐른다. 의외다. 음악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걸까. 차라리 태국 음악을 틀어달라고 할까.
옆 테이블에 아마도 미국인과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둘이 앉아서 사업 얘기를 하고 있다. 방콕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엿듣기로는 광고 전략과 마케팅 방식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사무실에서 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와서 일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약간 마음이 아프다만. 그래도 옆에서 떠들고 있으니 그나마 덜 심심해서 좋긴 한데 이렇게 고요한 분위기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늦게 올 걸 그랬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손님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아저씨들이 없었다면 또 직원들이랑 절친이 될 뻔 했다). 역시 일하기에는 스타벅스가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가장 자주 갔던 다니엘 펍을 지나가며 오늘은 내가 딴 놈이랑 바람을 피울 것이니 우리는 내일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속으로 인사를 보냈다. 다니엘 펍 정말 미안해 쏘리. 내일 또 맥주를 퍼 마셔주겠어.
바텐더 양반이 심심했는지 아니면 나에 대한 환영 인사가 꼭 하고 싶었는지 칵테일을 잔 끝까지 꽉꽉 담아 줬다. 그래서 절로 사약 받는 자세로 공손하게 한 입 마셨다. 뭐가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달콤한 이 칵테일의 이름은 세렌디피티. 메뉴판을 한참동안 열심히 스캔해서 메뉴판 제일 위에 있는 시그니처 칵테일을 시켰다. 이럴거면 열심히 읽지나 말걸. 칵테일이 조금 흘러서 조심스레 티슈를 깔았더니 서빙해준 직원이 한국어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해서 놀랐다. 당연히 중국어가 나올 줄 알았는데. 여기다 오늘 내가 누울 자리가. 이따가 또 시키겠다. 고맙다 여직원이여.
어제 무에타이 클래스를 듣고 마사지도 받고 소염진통제도 먹어서 컨디션이 괜찮을 줄 알았더니, 오늘 하루 종일 기운이 없어서 해가 질 때까지 죽은 듯이 잤다. 중간에 일어나서 식당에서 새우 팟타이 먹고. 아주 유명하고 대단한 식당이 아니더라도 방콕의 어느 식당이나 팟 타이는 평균 이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오늘 기운을 차리면 스트리트 아트로 유명한 거리로 가볼까 했는데 비가 온다고, 어쨌든 온다고 해놓고 안와서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앞으로 아이폰 날씨 예보는 믿지 않기로. 타이페이 날씨도 완전 헬인데,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 안심하고 가기로 했다. 이제 방콕에서의 시간은 딱 하루 남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버린 건지.
무에타이 수업 들은 것에 대해 한참 쓰고 잠시 짬이 나서 여행 에세이 수업을 진행해주신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 덕에 제 글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콕에 와서 무에타이 수업도 들었습니다. 방문한 도시에서 무언가 배워보면 좋겠다고 충고해주신 덕분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요지의 메일을 보냈더니 조금 전에 답메일이 왔다. 선생님은 내게 자신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서 기쁘다며, 여행 중이라니 부럽다는 답신을 보냈다. 내가 정확히 누군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학생이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만큼 뿌듯할 때가 없다. 선생님도 그래야 할 텐데...
선생님, 하니까 어제 내게 발차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생각난다. 클룩에도 후기를 남겼다. 방콕에 와서 했던 것 중에 가장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라는 경쾌한 말이 사람들을 자극하기를 바라며. 그들은 내가 여기 와서 딱히 한 게 없다는 걸 모르겠지만 아마 사원이고 왕궁이고 쇼핑이고 마사지고 맛집, 카페, 클럽, 바 투어를 다 했어도 무에타이 수업이 최고였을 거다.
타이페이 여행은 늘 그렇듯 하나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예약한 호텔이 타이페이의 어느 지역에 있는지조차 체크를 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타이페이에서 구도심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디화제라는 곳에 있었다. 그걸 이제서야 알았네. 두 번째로 묵을 호텔은(그렇다 나는 무려 호텔을 한 번 옮기는 일도 감행한다. 세상에서 귀찮은 걸 가장 싫어하는 내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중간에 비행기 스케줄을 바꿔서 그렇게 됐다)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타이페이에서는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는데(다른 여행객에 비하면 많지도 않다), 늘어지지 않고 하루에 하나 씩 계획한 일을 하는 것이 관건이다.
옆에 앉은 아저씨들이 50세가 넘으니 살이 찐다고 슬퍼하고 있다. 글로벌하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자녀들도 홍콩,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지에서 공부 및 일을 하고 있다고. 나도 모르게 엿듣고 있는데 은근 흥미롭다. 아저씨, 사실 서른만 넘어도 살이 쉽게 찌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잘 빠지지 않는답니다. 오십까지 몸매를 유지하셨다니 부럽군요.
두 번째로 시킨 것은 캐리비안 럼 어쩌구라는 이름의 칵테일이다. 이 바에서 개발한 칵테일을 마셔봐야 하는 것 같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그럴 듯한 것으로 시켰다. 물론 이것저것 읽어보는 게 귀찮기도 하고. 조명이 어두워서 심봉사처럼 더듬더듬 메뉴를 짚으며 주문을 했더니 어여쁜 직원이 싱그럽게 웃는다. 자기야, 자기도 언젠가 알겠지만 서른 중반이 지나면 노안이 온답니다. 그래도 내가 웃게 해줬다니 기쁘군요. 써놓고 보니 변태같다.
캐리비안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에 걸맞게 컵의 가장자리에 예쁜 꽃을 집게로 고정해서 준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치장을 한 음료는 처음 본다. 과일 맛이 물씬 풍기는 열대 지방에 어울리는 칵테일이다. 언젠가 캐리비안 해안에 가게 되면 이런 칵테일을 마시게 될까? 내가 그렇게 먼 곳으로 갈 마음이 들기나 할런지 모르겠네.
에미넴이 나온다. 여기와서 에미넴의 랩을 듣게 될 줄이야.
한참 글을 쓰는 도중에 캐세이 퍼시픽에서 셀프 체크인을 하라는 메일이 와서 아이폰으로 체크인을 했다. 벌써 자리 지정이 거의 다 끝나 있었다. 아니 홍콩 사람들 이렇게 부지런해도 되는 거야. 고심 끝에(딱히 선택권이 없었지만) 날개 바로 옆에 창가 자리를 선택했다. 구석에서 쭈그리고 가야지 별 수 있나.
항공권 관련 메일을 볼 때마다 혼자 빵빵 터지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기내에 들고 탈 수 없는 아이템에 대한 설명이었다.
폭발물, 방사능 물질, 유독성 물질 등등. 세상 어느 미친놈이 이런 걸 들고 민간 항공기에 탈 생각을 할 것이며, 이런 걸 들고 탈 생각이 있는 인간이 항공사의 지시 사항에 따를 리 만무하다. 폭탄 테러할 생각이 있는 놈이 비행기에 폭탄 들고 탈 생각을 할까 말이다. 물론 자국 항공기를 날려버린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있긴 한데, 에스코바르가 야야, 이런 건 비행기에 들고 탈 수 없지 않아?하면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보통 ‘무차초’라고 한다. <나르코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에게 물어보는 장면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타란티노의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오면 나는 자지러지게 웃다가 눈물을 흘리며 쓰러질 것이다. 이런 내 취향에 가장 근접했던 장면은 바로 <장고>에서 주인공들을 기습하려던 남부 KKK단의 어리숙한 태도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마스크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서 앞을 볼 수 없다며 티격태격하는 멍청한 이들의 대화 장면을 보다가 너무 웃겨서 결국 울었다.
옆에서 신나게 마케팅에 관한 토론을 하던 아저씨 중 한 명이 총총 사라졌다. 다른 아저씨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네. 아쉽게도 둘 중 핸섬한 아저씨가 갔기 때문에 나도 이 잔을 비우면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다.
방콕에서의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