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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5. 2019

칵테일 말고, 커피

6/18 Day 9. 

방콕문화예술센터 다녀왔다. 가죽으로 된 팔찌와 영화 스틸컷같은 그림엽서를 구입하고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하고 쓰다.     


방콕문화예술센터는 방콕의 미술관에 대한 평들이 고만고만하게 나빠서(?) 그저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찾은 곳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같이 빙 둘러가며 전시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게 동선이 짜여 있다.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히잡을 두른 무슬림 여성을 목격했다


그 중간 중간 직접 자신의 작품을 팔러 나온 아티스트들의 테이블도 있었다. 보기만 해도 귀여운 작품들이 많아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나 유기농이라고 온 몸으로 소리지르는 듯한 컨셉의 카페도, 예쁜 엽서와 독특한 책들과 개성 넘치는 팔찌 등을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서점도 있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와서 구경하고 카페에서 차도 한 잔 마시면서 글을 쓸 걸 그랬다. 


이렇게 귀여운 그림책도 있고 
이렇게 귀여운 딤섬과 식기 모형도 있다
미대 입시생의 고뇌를 담은 작품인가 했지만 작품의 의도는 알 수 없다. 나도 죽도록 그렸던 줄리앙이 요기 있네


간결한 규모의 사진전. 가장 오른쪽의 사진이 인상적이라 아이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은 ‘시암 디스커버리’나 ‘MBK 센터’같은 거대 쇼핑몰과 같은 장소에 있기 때문에 쇼핑을 하다 지친 사람들이 간단히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영화 <원스>와 <비포 선라이즈>의 인상적인 한 장면을 담은 그림엽서와 여러 줄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샀다. 이 팔찌는 그 후 여름 내내 나의 모험에 동참했다. 쇼핑을 끝낸 후 1층에서 열리는 작은 규모의 사진전을 구경하고 호텔 근처 편의점에서 저녁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사서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오븐에 구워주는 치즈 샌드위치는 대단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끼니를 때우기 귀찮을 때 종종 사먹곤 했다. 이 맛있는 것도 이제 못 먹겠네.      


저녁을 먹은 후 대강 짐을 싸고 ‘파인드더포토부스’에 마지막으로 왔다. 그런데 직원들 상태가 나보다 더 심각하다. 처음 봤을 때 웨이터 직무만 했던 귀요미 띤은 바텐더 테스트 중이라 완전 초긴장 상태고, 나에게 엄청난 칵테일을 만들어줘서 완전 맛이 가게 했던 다른 바텐더 뺀은 어제 술을 너무 퍼마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다 비슷하다.     


한가하다 싶어서 얼른 마시고 일어나야지 했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고 나도 은근 취했다. 오늘 마신 칵테일은 '올드 패션드'와 '방콕, 유브 갓 메일'. 슬슬 일어나서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매니저 눔이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만들어 줄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 틈을 타 나는 바로 옆 스타벅스에 가서 아메리카노와 라떼 등등을 사서 조공을 했다. 그들이 파는 칵테일에 비하면 완전 저렴한 가격의 커피인데도 모두가 너무 감동했다. 이제까지 본인들에게 술을 산 손님은 있어도 근무 시간에 기운내라고 커피를 사다 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왜 이리 세상 인심이 야박한거야. 매니저인 눔은 정말 감격한 얼굴로 샷을 만들어주더니 급기야 다 같이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사진 찍히는 걸 세상에서 열두 번 째 정도로 싫어하지만(싫어하는 건 대략 삼만 오천 개 정도 있다) 흔쾌히 함께 찍었다. 커피를 사왔더니 다들 싱글벙글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어쩐지 짠하기도 하고. 세계 어디서나 고생하는 청춘들에게는 절로 응원을 보내게 된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함께 사진도 찍었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더니 위스키를 새로 따서 또 마시라고 준다. 이 위험한 양반들. 더 있다간 진짜로 내일 비행기 놓칠 것 같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물론 눔이 만들어 준 칵테일은 다 마셨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굉장한 맛의 칵테일이었다) 비틀비틀 호텔로 돌아왔다.      

그들이 이 낯선 방콕에서 유일한 친구들이라 그런지 헤어지고 오는 길 많이 서글펐다. 나처럼 쉽게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는 인간은 일단 한번 마음에 들면 또 쉽게 헤어지지 못한다. 특히나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서 금방 친해지고 또 금방 헤어지는 관계는 허다할 것인데. 나 같은 고슴도치가 마음을 열었다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들은 알까. 칵테일 만들고 또 손님 접대하느라 바쁜 귀요미한테는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돌아서는 길, 눔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서 나도 꾸벅 절하며 고맙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내게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번 겨울이나 내년에 다시 올게요 꼭. 나는 진심이었는데 그 마음이 전달이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언젠가 헤어져야 할까. 그걸 알면서도 늘 힘들어한다.     


귀요미가 그럼 8월에 베를린에 갔다가 다시 태국으로 오는 거죠?라고 물으며 해맑게 웃기에 나도 모르게 빵빵 터지며 또 웃었다. 태국 남자들은 정말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이 친구도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능숙하게 상대하지만 그런 면을 보면 아직 스물 한 살인 티가 난다. 앳되고 착한 그 아이가 앞으로도 별일 없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런 아쉬운 기분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으니 타이페이에서는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으련다. 내일이면 이런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또 길을 떠나야 한다.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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