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Sep 15. 2019

공항에서 왜 요가 수업은 하지 않는가

6/19 Day 10. 오후 2시 

방콕 수완나품 공항 게이트 앞에서 쓰다. 


방콕 시내 교통 체증이 살인적이라고 하기에 8시도 되기 전에 호텔에서 출발했다. 클룩 기사님이 일찌감치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 너무 일찍 와서 카운터도 안 열었으려니 했는데 체크인을 해주더군. 근데 캐리어가 20킬로가 되어서 매우 당황했다. 쇼핑이라곤 엽서 몇 장 산 것이 전부인데 어째서 짐이 이렇게나 많이 늘어난 것인가. 나는 궁금했다. 


체크인을 끝내고 멍하니 있는데 알림이 왔다. 국세청에서 작년에 낸 세금이 환급되어 내 계좌로 안착했다는 은행 어플의 알림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앙!! 대만가서 고기 사먹어야지. 나는야 35만원에 희희낙락하는 자본주의의 노예. 


짐이 나도 모르게 증식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가장 그럴 듯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입고 난 후, 옷이 살이 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피곤하니 별 미친 소리가 다 나오네. 


약간 충격을 받은 채로 보안 검색대에 들어갔더니 이 아침부터 출국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피곤해 보이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뿐. 어떻게 다들 이렇게 활력이 넘칠 수 있는지. 신발까지 벗어서 꽤나 엄격하게 검색을 했다. 보안 검색을 하고 출입국 심사대로 갔는데 여기서 속이 터졌다. 아니 여권 주고 지문 찍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한참을 심사대에서 밍기적대는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인 모녀 같았는데 애는 다 끝난 줄 알고 자꾸 가려고 하고. 이 엄마는 아무 생각이 없고. 결국 중국어가 가능한 다른 직원까지 출동하여 그 모녀를 출국 심사대에 붙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10분은 더 기다린 듯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출입국 심사대에서는 습습한 속도로 행동하도록 단단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들 때문에 안 그래도 당 떨어진 상태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져 서둘러 식당을 찾아 떠났다. 더는 햄버거도 샌드위치도 먹지 않으리. 사실 열흘 동안 몇 번 먹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질렸다. 태국 음식도 딱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저 얼큰한 게 먹고 싶었다. 이를테면 순대국밥. 꽤나 구체적인 메뉴가 생각나는 걸 보니 한국 음식에 대한 욕구가 드디어 생겨난 듯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돼지 고기와 버섯이 들어간 물에 만 밥이었다. 아주 뜨근하고 얼큰해서 순대국밥 먹듯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먹어치웠다. 이 아침에 볶음밥에 맥주를 먹는 사람이 있었는데(혹은 햄버거나 피자에 맥주) 그들의 식욕이 존경스러웠다. 따끈하게 데워진 배를 두드리며 커피 클럽에 가서 아이스 라떼를 사 마셨다. 이제 남은 돈은 정확히 100바트. 이걸로 매그넷을 사자! 호기롭게 기념품 샵에 들어갔는데 하나에 165바트라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나왔다. 굳이 카드결제까지 해가며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뿐더러 디자인도 예쁘지 않았다. 포도를 앞에 두고 물러서야 했던 여우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홍콩행 탑승까지는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캐세이 퍼시픽 항공사는 이 공항에서 인싸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가장 끝에서 끝의 게이트로 배정을 받았다. 이 게이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본인의 보딩 패스를 보여주며 여기가 맞는지 물어봤다. 맞...겠죠? 물론 둘 다 착각했을 가능성도 막판에 게이트가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타이페이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줄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근데 너무 졸리니까 잠깐 누워서 자기로 마음 먹었다. 눕자 누워.      


방콕이여, 안녕


오후 2시, 홍콩행 비행기 안에서 쓰다.


아까 게이트 앞에서 잠깐 자려고 했는데, 심지어 의자도 무척 편했는데 거기서 자빠져 자고 있으면 중국인 관광객의 민폐 사례로 찍힐까봐 참았다. 안 그래도 다들 중국인인줄 아는데 말이야. 몸이 너무 뻣뻣하고 답답하여 전 세계 모든 공항에서 30분마다 스트레칭 및 요가 수업을 진행하도록 유엔에 건의하고 싶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이런 거 왜 발의하지 않느냔 말이다. 


세금 환급 받아서 자랑하려고 리타언니한테 카톡했더니 언니는 부서 회식으로 부페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 질 수 없다. 나도 대만가서 고기 먹어야지. 근데 하도 안 돌아다니고 술만 처 마셨더니 배가 엄청 빵빵해졌다. 그새 또 살이 쪘다. 타이페이에서는 의무적으로 나가서 움직여야겠다. 동남아시아를 3주나 다녀온 인간이 이렇게 허여멀건-하면 안 되지 않을까.


아까 아침을 든든히 먹은 관계로 기내식은 패쓰했다. 비행기에서는 뭘 먹어도 먹는 것 같지도 않고 배만 너무 불러서 항상 후회한다. 근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후식으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줘서 약간 아쉬웠다. 열흘 전에 탔을 때는 안 주더니만! 3-4-3 좌석이 배치된 기종인데다 체크인을 늦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창가 자리에 콕 박혀 있다. 다행히 옆 자리에는 영화 감상에 푹 빠진 젊은이들이 있어서 아주 쾌적한 비행이 되고 있다. 윽 나 <캡틴 마블> 아직도 안 봤는데. 큰 화면으로 제대로 보고 싶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보지 않는 것으로 했다. 근데 너무 재밌나보다. 옆에 앉은 총각이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어가며 열혈 시청 중이다. 위도가 낮은 곳에 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감정 표현이 확실한 것 같다. 홍콩행 비행기가 20분이나 늦게 이륙해서 굉장히 짜증이 났다. 허나 짜증이 온 얼굴에 가득한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보였다. 캐세이 퍼시픽이 내게 또 엿을 주면 안되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한국 패치가 확실하게 되어 있다. 


최신 기종의 비행기를 타면 무슨 프로그램이 있나 조금 둘러보다가 항상 지도를 켜놓는다. 옛날에는 2D로 출발지에서 목적지 까지만 하염없이 쭉 보여줬는데 요새는 완전히 3D 그래픽을 이용하여 다각도로, 심지어 조종사의 시점으로까지 너님이 지금 어느 하늘에 떠 있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지루하지 않게 줌인과 줌아웃도 적절히 섞어서. 지금은 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바다(통킹만) 위를 지나고 있다. 지도를 보면 평생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낯선 도시의 이름이 나타난다. 베트남이 이렇게 길구나, 태국이 이렇게 크구나... 감탄도 하면서.


난닝


하이퐁


사꼰나콘


박 장


나콘라차시마


보통 사람의 창의력으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제 한 시간 후면 홍콩에 도착한다. 타이페이 여정을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칵테일 말고, 커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