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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5. 2019

난 슬플 때 아이돌을 들어

6/15 Day 7.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샤이니의 ‘데리러 가’를 들으며 쓰다. 정오까지 8분.     


오늘 새벽 꿈에 엄마와 아빠가 나왔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몇 번 꿈에 나온 적이 있는데 이번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게 장난을 치며 기뻐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보기 드물게 자상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나한테 허물없이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걸 꿈에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내가 혼자 사는 게 걱정되어 모처럼 두 분이 함께 날 보러 오신 것 같았다. 엄마는 집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잠깐 하신 다음에 내가 다 먹지도 못할 반찬을 한 가득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막 하려고 하셨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모조리 하셨다. 아빠는 그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내 웃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에 몸도 마음도 많이 편찮으셨기에 대체로 표정이 없었다. 평소에는 늘 눈에 웃음을 담고 사시던 분이었는데. 왜 그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아무도 몰랐을까.     


엄마가 이제 당신의 곁으로 오셨으니 그것도 그 나름대로 행복하신 거 같았다. 두 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엄마는 결국 아빠를 용서하신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가 불꽃같이 집안일을 하시는 걸로 오늘의 꿈은 마무리됐다. 내가 어찌 하고 사나, 여행은 와서 고생은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엄마는 늘 그렇듯 내 걱정을 하셨나보다. 그래서 이 먼 방콕까지 나를 찾아오셨나 보다. 술병나서 온종일 비몽사몽하고 있었던 걸 본능적으로 아셨나. 저거 저거 또 술 처먹고 골골대는구만 아유 저 술꾼. 누굴 닮아서 그래. 아유 저게 딸래미만 아니면 그냥. 참고로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굉장한 주당이셨다.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만이 있는 공간에서는 쉽게 눈물이 난다. 이래서 방에 혼자 있을 때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울할 때 샤이니를 듣는다. 그럼에도 기운이 특히 없을 때는 워너원의 ‘에너제틱’을 듣는다. 플라시보 효과처럼 에너지가 생겨서 움직일 힘이 난다. 오늘도 샤워하면서 머리를 말리면서 이 글을 쓰면서 각종 남자 아이돌들의 대표곡을 듣고 있다. 그래야 나가서 밥이라도 먹을 것 같다. 특별히 우울한 건 아닌데, 한국에서처럼 다시 또 기운이 없다. 커피를 많이 안마시고 매일같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이곳의 아쉬운 점은 밤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딱히 들어갈 곳이 없다는 거다.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도 10시면 문을 닫는다. 다른 카페들은 그전에 닫는다는 소리다.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거리라 보통 12시까지 카페가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결국 맥주 두 잔...세 잔 그렇게 계속 술을 마시며 컨디션을 망가뜨리고 있다. 오늘부터는 저녁을 먹고 근처 펍이 아닌 카페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 이제 사람 구경은 더 안 해도 될 것 같다. 대체로 비슷한 사람들이 골목을 메우고 있다.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광경은 아니다. 


어제부터 주말의 시작이었다.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 소음은 대략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근처 호텔의 루프탑 바에서 레이저 쇼라도 하는 듯 번쩍였다. 저런 곳에 가볼까 하고 가이드북에 가뜩 표시를 해놨으나 전혀 가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람들로 엄청나게 북적일 것이 분명하니 술 마시며 멍 때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굳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파인드 더 포토 부스’ 같이 아늑한 규모의 재미난 바가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애매한 루프 탑 바에 가는 대신 재즈 공연을 한다는 클럽에 찾아가볼 생각이다. 일요일에는 선데이 브런치도 있다고 하니 슬슬 가도 좋을 거 같다.     


여기 와서 알았는데 나는 경치에 크게 흥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야경은 봐서 뭐하나. 나는 그 속에 있는 걸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 곳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런 게 궁금했다. 그제 만났던 방콕의 젊은 바텐더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그나마 갈증을 조금 풀었다. 내가 여행기를 쓰고 있다고 설명하며 까먹을까봐 바로바로 아이폰으로 메모를 하니까 다들 더 성의있고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줬다. 고마운 사람들. 타이페이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들를 생각인데 이럴 줄 모르고 한국에서 아무 것도 준비해온 게 없다. 선물로 적당한 뭐라도 좀 사올 걸. 인사동에 많이 팔더만.     

 

그저께 수경언니와 꽤 오래 카톡으로 통화를 했다. 살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종류의 인간들이 언니네 학교 학부모로 있었다. 그 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아마 원형 탈모로 고생 중일거다. 학생들 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들도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미쳐가는 걸까. 빨갱이가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어서?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늘 먹던 팟타이와 진한 망고 쥬스로 정신을 차리고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사진을 이래도 겁나 맛있었다

책을 읽다가 지겨워지면 샤이니와 유노윤호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너무 더우면 설렁설렁한 발걸음으로 풀장을 걸어 다니며 물놀이를 했다. 나무늘보도 나보다는 많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선베드에 누워 있다가 모기에게 몇 번 물리고 나자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도 먹지 않고 호텔 방에 앉아 지난 며칠 동안의 일기를 다듬었다. 갑자기 천둥 소리가 났다.    

  

토요일 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방콕 시내를 요란하게 적셨다. 이렇게 본격적인 비는 오랜만에 봐서 약간 흥분했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의 행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너편 호텔의 루프탑 바는 아랑곳 하지 않고 허공 여기저기로 레이저 빔을 쏘아댔다. 잠시 내 방의 불을 끄고 거리에 퍼붓는 소나기의 풍경을 아이폰으로 촬영했다. 초현실적이었다.      


방콕에서의 일곱 번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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