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 Day. 6
호텔 바로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 '칸티나'에서 라자냐를 주문하고 쓰다.
오후 10시. 이 시간에 술은 많이 마셨어도 밥은 처음 먹어본다.
엄청난 숙취로 저녁까지 물만 마셨다. 어제는 무사히 돌아와서 호텔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으나 너무 취해서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먹지 않았다. 신경정신과 선생님은 술에 취한 채로 약을 먹는다고 해서 당장 쓰러져 죽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고 이미 한차례 경고를 하셨다. 선생님, 제가 이렇죠 뭐. 한심하다고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상관없다.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너무 더워서 아무데도 가지 못할 날씨였다. 해진 다음에 나와도 숨이 막힐 정도로 대단한 더위다.
숙취로 고생하는 와중에 엄청난 꽃미남이 나오는 걸로 일대 큰 충격을 안긴 프랑스 퀴어 드라마 <스캄> 시즌 3를 시청했다. 아무 생각없이 호텔의 TV를 틀었으나 연결 문제인지 뭔지 픽셀이 깨져서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유튜브 버전에는 영문 자막이 있겠거니 했는데 이미 한국의 능력자들이 한글 자막을 입힌 버전을 업로드했다.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 영위하는 성생활은 한국의 대학생을 능가하여 역시 저 나라는 뭐가 달라도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드라마의 주역을 맡은 천사 중 한 명은 아주 유명한 모델인데, 그의 풍성한 속눈썹으로 바닥 청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남자한테 인간 샤넬이라고 불러야지. 너무 퇴폐적으로 아름답게 생긴 얼굴이라 여러 장면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쟤네 엄만 뭘 먹고 저렇게 예쁜 아들을 낳았지? 누가 리플로 존잘쉬먀. 라고 한 단어를 남겼다. 20분 정도 웃었다.
그리고 꽤나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이제 드라마도 1-5분 정도의 짧은 클립으로 나누어서 서비스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차책을 챕터별로 구매해서 읽는다는 트렌드에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 구나 감탄했는데, 드라마까지 그런 형식을 취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의 외모만큼이나 굉장히 충격적인 변화였다.
흡족한 마음으로 유튜브 시청을 마시고 잠시 구글 검색을 하여 근처에 괜찮다는 스파에 찾아가 아로마 테라피 마사지를 받았다. 그 스파는 바로 하파 스파. 허나 가는 길이 너무 안 좋아서 두 번은 못 가겠지 싶다. 이쪽으로 가는 길은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거의 없다시피 한데 통행 방향은 한국과 반대라 1차로 패닉이 온다. 무엇보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이기 때문에,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어제는 바이크가 수많은 차량들 사이에서 서로 접촉 사고를 내는 장면도 목격했다. 당사자들은 짜증 한 번 내고 만 걸보니 이 정도는 흔히 일어나는 사고 같다. 이 더위와 교통 체증을 뚫고 받은 아로마 테라피 마사지로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이제 정신이 들었으니 배를 채워야 했다.
숙취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외할머니가 해주신 것 같은 고향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요리를 먹으면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근처의 이탈리아 식당. 그렇다. 라자냐야말로 할머니 손맛이 살아있는 멋진 숙취 해소용 요리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이 늦은 시각에도 정찬을 즐기는 사람들로 식당 안은 번잡했다, 이 거리에 즐비한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수단으로 오픈 키친을 선택한 지극히 모던한 식당이다. 동아줄(?)같은 끈으로 방대한 양의 마늘을 주렁주렁 엮어 주방과 홀을 구분하는 벽에 매달아 놓았다. 시골집 벽을 장식한 수많은 메주를 영접한 기분이었다. 명절에 할머니댁(정작 양가 할머니 댁에 이런 오브제는 없었지만)을 찾은 것만 같았다. 이 정겨운 곳에서 할머니 손맛의 라자냐를 먹고 말겠다. 이 지독한 숙취에서 벗어나겠다.
라자냐와 탄산수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식당 안의 손님들을 구경했다. 어디에서도 태국어는 들리지 않았다. 다분히 외국인 관광객을 타겟으로 한 식당이기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영어 혹은 힌디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글로벌한 식당의 이미지에 걸맞게 매니저도 멀끔한 외모의 백인 남성이다. 뉴욕 풍의 힙스터 스타일이었다. 이 시간에 혼자 묵묵히 밥을 먹는 사람이 오직 나 하나 뿐. 홀로 밥을 먹는 것이 슬슬 익숙해졌다. 누구의 눈도 신경쓰지 않고 먹고 싶은 걸 먹고 그 와중에 아이폰 액정 화면이 아닌 책을 들여다보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상이었다. 해보니까 되네?
이 근방에는 꽤 유명한 클럽들이 모여 있다. 마치 미서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래퍼의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화려한 차량이 미끄러지듯 정문에 멈추어서 새하얀 모피 코트를 입은 사람들을 내뱉는 그런 류의 클럽이다. 그런 클럽에서 금요일 밤을 즐기고픈 외국인 여성들이 내 주변 테이블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몸에 쫙- 달라붙는 소재의 색색깔의 화려한 미니 드레스를 입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짙은 향수를 뿌렸다. 12센치는 될 듯한 하이힐을 신고도 거침없이 걸어 다니는 걸로 보아 아직 무릎 관절이 탄탄한 것 같았다. 그녀들을 보기만 해도 피곤했다.
가끔 클럽에 가기는 했어도 마이클 잭슨의 초기 앨범이나 프린스의 음악이 나오는 곳이었기에(물론 샌프란시스코였다), 이 동네의 유흥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도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달뜬 얼굴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며 할머니 손맛의 라자냐를 싹싹 긁어먹으니 누렇게 뜬 얼굴이 점차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 거리의 열기에 흥분한 사람들 틈을 헤집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콕에서의 여섯 번째 밤이었다.